몇 년 전 아프리카 케냐의 정부당국자들이 필자가 근무하는 연구원을 방문하여 에너지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에너지정책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나서, 한 분이 던진 말속에 필자의 머리를 스치는 뭔가가 있었는데요.
수력발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케냐에서 가장 큰 에너지 문제는 하늘에서 내리는 강수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에너지 안보는 기상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죠!
에너지 안보란 국가별로 상대적인 개념
에너지 안보란 아주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각국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해석되죠. 물론 공통된 요소는 있습니다. 바로 에너지가 그 나라의 경제발전과 국가안위에 필수적이라는 것이죠.
에너지 사용량의 96.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에게 있어서는 우리식의 에너지안보 개념이 있습니다. 석유를 100% 수입하는 한국은 1,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중동지역의 정정불안과 석유공급의 차단가능성이 에너지안보의 핵심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수십년 동안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 정책은 탈석유를 기초로 하는 에너지원 다변화, 석유수입원 다변화, 전략적 원유비축 등이었습니다.
9.11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겪은 미국은 에너지인프라의 보호가 에너지 안보의 외연 속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을 비롯한 원전 의존국은 에너지믹스에서 차지하는 원전의 비중이 안보정책의 핵심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에너지 공급국가에 있어서의 에너지 안보
에너지 공급국 입장에서 바라본 에너지 안보는 완전히 시각이 달라집니다. 석유, 가스의 대규모 공급국은 안정적 수요처를 확보하는 것이 자국의 에너지 안보, 경제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가장 좋은 사례는 러시아일 것입니다. 러시아는 가스공급력을 바탕으로 유럽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지렛대로 삼아 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 셰일가스의 등장과 함께 공급국 러시아의 위상이 크게 줄어들고 있죠. 최근 우크라이나에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2006년과 2009년의 가스공급중단 사태 때와는 달리 유럽 등 세계의 에너지안보에 미치는 파장이 크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또 다른 에너지 공급국인 캐나다도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든든한 대규모 수요처를 기반으로 에너지 안보가 담보되어 왔는데요. 그러나 미국내 가스∙석유의 자급증가로 캐나다의 수출규모가 줄고, Keystone 파이프라인 문제가 미국-캐나다간 정치현안으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아시아권으로 수출선을 전환하고자 하지만, 서부해안으로 가스∙석유를 수송시킬 파이프라인 건설에 대한 원주민(First Nations)의 반대가 우리의 밀양송전탑 건설만큼 어려운 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에너지 안보의 상대적 측면과 아울러 시대적 안목을 갖고 접근한다면 에너지안보의 내재된 위기를 미리 감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위기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처럼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발생될 수도 있지만, 한 국가 내부의 정치상황 및 제도적 변화에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형 에너지 위기 시대에 돌입해 있다!
2011년 한국에서 일어난 순환정전 사태는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전력안보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지만, 정부의 전기요금에 대한 규제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나타난 것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밀양송전탑 문제가 붉어지면서 에너지 안보에 국민적 동의와 수용성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통칭하여 ‘선진국형 에너지위기’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에너지 수급을 계획으로 통제가능한 시대가 아니며 권위주의적 정부의 힘에 의해 에너지 인프라를 확대할 수 없는 선진국형 에너지위기의 시대에 돌입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60~70년대에 걸친 농어촌전화사업과 전력망현대화 사업은 한국의 에너지인프라와 산업발전이 성공적으로 연계된 모범사례로서 KSP 사업의 단골메뉴로 제시되는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 자랑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한국에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셰일혁명에서 촉발된 에너지 지형 변화
시대는 변합니다. 더욱이 에너지를 둘러싸고 더욱이 급변하고 있죠. 약 5년 전만 해도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이 이렇듯 혜성처럼 등장하여 세계 에너지 정세를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어떤 전문가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랍의 봄 이후 이란 핵문제, 시리아 사태 등 일련의 급변하는 중동정세에도 불구하고 크게 요동치지 않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국제유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발전용 가스수요의 단기적 급증을 수용할 정도로 충분한 가스공급 등 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 셰일시대의 혜택으로 보입니다.
국제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중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기존의 에너지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국제정치 역사가들이 서기 2010년 즈음한 시대를 하나의 터닝포인트로 기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에너지 정세 변화는 한국에 결코 불리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 측면에서도 그렇고, 에너지 수입국 입장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되고 공급되는 것은 분명 유리한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에너지 안보위기에 대한 해법
이러한 정세변화 속에 우리의 입장에서 에너지 안보위기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요?
1. 국제적 리스크 관리전략 차원의 해법 모색
우선 국제적 리스크 관리전략의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사례로서 국제에너지기구(IEA) 일원으로서 전략적 원유방출 등의 국제적 공조는 리스크 분담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원외교 대상국가의 질적 확대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죠. 최근 자원외교가 기존의 저개발된 자원부존국 중심에서 벗어나, 미국과 캐나다 등 법제도를 안정적으로 구비한 국가로 확대되고 있음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와는 가스 도입계약이 이미 체결되고 있습니다.
2. 동북아 국가간 협력기회 활용
무엇보다 한동안 회의론이 팽배해졌던 동북아 국가간의 새로운 협력기회도 생겨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중일 3국간 석유∙가스 도입가격 조건의 유연성 증대 등 아시아프리미엄 해소를 위한 공조, 원자력 안전성 제고를 위한 협력의 필요성은 3국 모두 공감하고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잘 활용하면, 동북아지역 국가들은 역내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생산과 수송, 그리고 자유로운 교역 및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에너지 안보를 증진시켜 나아갈 새로운 모멘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정부정책의 예측가능성 증진
다음으로 에너지 안보위기에 대응해 나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일입니다.
국내적인 에너지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잦은 정책변화로 인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가 사이클에 따라 진퇴를 거듭해 온 역사를 보입니다. 특히 에너지위기를 드문드문 몰아치는 소나기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여, 이에 대응하는 정책기조도 단기성을 띤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해외자원개발 정책의 부침일 것입니다. 최근 공기업 개혁과 부채삭감이라는 정치적 아젠다 속에 해외자원개발 정책도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가 공기업을 존속시키는 이유는 단기적인 수익변화나 투자환경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정책기조 속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이러한 목적의식에 입각한 정책기조가 없다면 해당 공기업이 있을 이유가 없고, 수익성을 따라 움직이는 민간기업에 맡기면 됩니다.
에너지기술 경쟁력의 확보, 에너지 설비투자 확대, 해외자원개발 투자, 에너지 전문인력의 양성, CO2 배출 문제 등 다양한 변수들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일관성 있고 예측가능한 정책이 되도록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규제개혁과 안전문제는 에너지부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경제적 규제(진입,가격)가 심하게 존속하고 있는 에너지산업의 규제개혁이 에너지안보를 증진시키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글을 맺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