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精油社)는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수송에너지인 휘발유와 경유 같은 석유제품이 정유사의 대표적인 생산 제품이다. 정제 과정에서는 석유화학 원료인 납사(Naphtha)도 생산된다. 납사는 추가 공정을 거쳐 휘발유 같은 경질 석유제품이 생산되기도 하고 석유화학 원료로 공급되기도 한다. 정유사들이 석유제품에 더해 에틸렌, 벤젠, 톨루엔 같은 기초 화학제품도 생산하기는 하지만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석유화학사와는 차별화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유사들이 올레핀 산업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며 종합 석유화학 기업으로의 변모에 나서고 있다. 석유화학산업의 쌀로 불리는 올레핀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점찍고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오는 2022년에는 국내 4개 정유사 모두 본격 생산에 나설 수 있게 된다. 수송에너지로 대표되는 석유제품 수요가 각종 환경 규제에 묶여 위축되고 있고 시장 경쟁도 치열해지면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정유사들이 올레핀 산업에 특히 주목하는 배경을 들여다 본다.
올레핀 그 무궁무진한 쓰임새!
‘올레핀에서 100년 기업 길을 찾다’ GS칼텍스가 올해 초 올레핀 생산 설비 건설 착수 소식을 알리며 소개한 보도자료 타이틀이다. 창립 50주년을 넘긴 이 회사는 앞으로의 50년을 올레핀 산업에서 찾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정유사는 지난해 거둔 영업이익보다 더 많은 금액을 올레핀 설비 건설에 투입하고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 국영 기업이 최대 주주인 S-OIL은 단일 플랜트 규모로는 단군 이래 최대라는 천문학적 자금을 올레핀 관련 시설 건설에 투자해 주목을 받아 왔다. 투자 금액만 무려 4조8000억 원에 달한다.
올레핀이 무엇이고 얼마나 중요하길래 국내 정유사들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것일까?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와 경유, LPG, 항공유 같은 석유제품만 생산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정유사(精油社)’들은 왜 올레핀 산업에서 미래 경쟁력을 찾고 있는 것일까? 올레핀에서 유래되는 다양한 석유화합물의 무궁무진한 쓰임새와 소비가 정유사들을 올레핀 생산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통 정제 산업의 수익성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정유사들이 올레핀으로 대표되는 석유화학산업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다는 평가이다.
국내 4개 정유사, 올레핀에 꽂히다
지난 2월, GS칼텍스는 전남 여수 제2공장 인근 약 43만㎡ 부지에 2조 원대 자금을 투입해 올레핀 생산시설(MFC 시설; Mixed Feed Cracker)을 짓겠다고 밝혔다. GS칼텍스가 2017년 거둔 영업이익이 2조16억 원인 것을 감안하면 한 해 내내 벌어들인 돈보다 더 많은 자금을 올레핀 생산 시설에 투입하고 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올레핀 사업의 성장성이 높고 다양한 다운스트림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어 미래 지속 성장을 추구하기 위한 장기적 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S-OIL은 총 4조8000억 원이 투입된 RUC & ODC 프로젝트를 최근 마무리했는데 그 결과 연산 40만5000 톤 규모의 폴리프로필렌(PP), 30만 톤의 산화프로필렌(PO) 등 올레핀 다운 스트림 생산 시설(ODC, Olefin Downstream Complex)을 갖추게 됐다. 이 회사가 투자한 자금은 단일 플랜트로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지난 5월 현대오일뱅크는 석유화학기업인 롯데케미칼과 합작해 2조7000억 원이 투입된 올레핀・폴리올레핀 생산에 나선다고 밝혔다. SK는 연간 86만 톤 규모의 에틸렌 등 올레핀 생산 시설을 가동 중으로 국내 4개 정유사 모두 올레핀 생산 시설을 갖췄거나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다. 이제 원유 정제 틀에서 벗어나 석유 화학 기업으로 변모하는 일만 남아 있다.
석유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 ‘올레핀’
‘올레핀(olefin)’은 탄소(C) 간 이중 결합 구조를 띠고 있는 화합물을 의미하는데 ‘석유화학산업의 쌀’로 불릴 만큼 중요한 화합물이다. 올레핀은 원유 같은 화석에너지에서 생산된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추출되는 납사(Naphtha)나 중질 유분 등에서 올레핀 계열의 다양한 석유 화합 물질이 생산된다. 플라스틱으로 불리는 합성수지는 물론이고 합성고무나 합성섬유 모두가 올레핀 계열 화합물로 만들어진다. 올레핀 유래 석유화합물들은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자동차, 전자, 건설, 제약, 의류 소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된다. 지구온난화나 미세먼지 이슈로 내연기관 자동차와 화석에너지를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 석유화학산업의 쌀인 올레핀은 화석에너지가 존재해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순간 전기차나 수소차가 모든 수송 수단 자리를 차지하고 휘발유나 경유 같은 화석연료가 설 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석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정유사들이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올레핀 생산 설비에 투자하고 지속 가능 경영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보다 더 친숙한 올레핀
머리 아픈 화학 명칭이나 화학 기호 대신 올레핀 유래 물질들이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알고 나면 그 쓰임새에 그저 놀랄 뿐이다. 플라스틱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꿈꿀 수 있는가? 비닐을 비롯해 냉장고 속 콜라가 담긴 용기, 식기가 먼저 눈에 띈다. 선풍기 날개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가구, 스포츠용품도 예외는 아니다.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 PolyEthylene Terephthalate)’라는 외계어 같은 단어를 알지 못해도 누구나 페트(PET)는 알고 있다. 물이나 탄산음료를 담는 페트는 유리병을 대체한 혁명의 물질인 플라스틱의 한 종류이다. 고밀도 폴리에틸렌으로 불리는 HDPE(High Density PolyEthylene)를 연상하기 어렵다면 플라스틱 우유병을 떠올리면 된다. 폴리프로필렌(PP, PolyPropylene)은 단단한 성질이 강해 치약이나 콜라병 뚜껑에 많이 사용된다. 이외에도 폴리염화비닐(PVC, PolyVinyl Chloride), 폴리스티렌(PS, PolyStyrene), 폴리카보네이트(PC, PolyCarbonate) 등 화합 방식만 다를 뿐 다양한 이름과 기능의 플라스틱이 우리 생활을 점유하고 있다. 합성고무나 합성섬유도 올레핀에서 유래된 제품들이다. 이쯤 되면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 없이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올레핀 없는 삶’이다.
원료 다변화・규모의 경제 등 경쟁력 갖춘 것으로 평가돼
올레핀 산업에 대한 국내 정유사의 대규모 투자는 우호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단 올레핀 수요 전망은 밝다. 시장조사기관인 IHS 자료에 따르면 올레핀 계열 중 하나인 폴리에틸렌의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연간 1억 톤에 달하며 연평균 4.2%에 달하는 수요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만 올레핀 산업에 대한 전 세계적인 기대감이 커지면서 생산 설비 신・증설이 늘어나고 시장 경쟁은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셰일가스 부산물인 에탄을 분해해 에틸렌을 생산하는 북미 지역의 에탄 크래커(ECC, Ethane Cracker) 같은 저가 원료 기반의 유사 시설들이 공격적으로 증설되면서 공급 과잉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 결과 북미 지역 에틸렌 가격은 하락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그럼에도 올레핀에 대한 국내 정유사들의 대규모 투자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GS칼텍스가 건설 중인 MFC 시설은 나프타를 원료로 사용하는 석유화학사의 NCC(Naphtha Cracking Center) 시설과 달리 납사는 물론이고 정유 공정에서 생산되는 LPG, 부생가스 등 다양한 유분을 원료로 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현대오일뱅크가 건설 중인 올레핀 생산 설비 역시 원유 찌꺼기인 중질유분이 주원료로 사용되면서 NCC에 비해 생산 원가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탈황 중질유, 부생가스, LPG 같은 정유 공장 부산물까지 원료로 투입할 수 있게 설비를 갖추면서 원료 가격이나 수급 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생산 원가는 낮추면서 부가가치는 높이는 일석이조의 기대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올레핀 산업은 원료 공급에서 수요처 확보에 이르기까지 연관 산업과의 수직계열화, 규모의 경제를 위한 생산 설비 규모 등이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국내 정유사들이 상당한 우위를 점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오는 2022년이면 국내 모든 정유사가 올레핀 생산 시설을 갖추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래 성장 동력 발굴에 나설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