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매장량이나 생산량만 놓고 보면 굳이 중동이 아니어도 좋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 부국은 남미 베네수엘라로 중동 산유국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많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인 BP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우방인 미국 역시 2016년 기준 하루 1235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며 전 세계 생산량의 13.4%를 기록할 정도로 에너지 부자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도입 원유의 중동산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중동산 원유가 단연코 가장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대량의 원유를 안정적이며 경제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최적의 대상이 중동이기 때문이다. 일단 지리적으로 가까워 수송비가 적게 든다.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산유국들은 원유 수출로 먹고사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원유를 꾸준하게 공급해줄 능력도 갖추고 있다. 막대한 원유 생산량을 자랑하지만, 대부분을 자국 내 소비에 사용하는 미국이나 원유 생산 능력이 제한적이고 지리적으로도 먼 베네수엘라보다 중동 산유국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사정은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화약고 같은 중동
이렇게 매력적인데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3개국이 틈만 나면 다른 산유국을 기웃거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지정학적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동은 종교와 이념 대립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의 화약고 같은 지역이다.
1970년대에 발생한 제1, 2차 오일쇼크(Oil Shock)는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1973년, 아랍국가와 이스라엘 간 전쟁 발발로 중동국가들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면서 수출을 금지해 발생한 것이 제1차 오일쇼크이다. 제2차 오일쇼크는 중동 산유국 간 내전에서 비롯됐다. 1979년 이란 팔레비(Pahlevi) 왕조가 붕괴하고 호메이니(Khomeini)가 집권하는 이란 혁명, 그 이듬해 벌어진 이란과 이라크 간 전쟁 여파로 전 세계는 제2차 오일쇼크를 겪게 되는데 당시 우리나라도 원유 수입에 막대한 차질을 빚으면서 수급 대란을 겪어야 했다.
중동 원유 꼭지 언제 잠길지 몰라~
가장 최근 벌어진 사건, 사고도 가히 충격적이다.
- 지난해 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이슬람 국가, Islamic State)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리비아 송유관 폭발 사고로 국제유가가 일시적으로 급등했다.
-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면서 중동 국가들의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면서 무력 진압 등의 소요 사태가 발생 중인데 미국이 반정부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면서 또 다른 갈등 요인으로 증폭되고 있다.
불과 한 달여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이 정도이고 전 세계 원유 수급이나 가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건, 사고들은 중동에서 ‘다반사(茶飯事)’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오일쇼크 때처럼 중동의 원유 꼭지가 막히거나 차단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 3개국은 또 다른 원유 공급원을 찾는데 분주할 수밖에 없다.
할인 대신 프리미엄을 요구하니…
중동에 대한 구애(求愛)가 지나쳤던 탓일까? 중동 산유국들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과 일본을 호구 고객 취급하고 있는 것도 중동 원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배경이 되고 있다. 한∙중∙일 3개국은 중동 산유국들로부터 이른바 ‘아시아 프리미엄(Asia-premium)’을 강요받고 있다.
중동 원유 가격 결정권을 행사 중인 사우디 국영 석유사 아람코는 아시아 주요 거래 기업을 대상으로 매월 원유 판매 가격 조정 계수를 적용해 유럽보다 더 높게 판매하고 있다. 두바이 원유와 오만 원유의 월간 평균 가격에 유종별 조정계수를 반영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동산 원유 주요 소비국인 아시아 국가들에 할증 요금이 적용되는 아시아 프리미엄 배경이 되고 있다. 구매 물량이 많은 큰손에게 ‘할인(discount)’ 해주는 일반적인 상거래 관행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으로, 원유 시장이 ‘공급자 중심 시장(Seller’s Market)’인데 따른 불합리한 거래를 강요받고 있다.
중동 원유 비중 지난해 하반기 이후 크게 감소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정부와 에너지 기업들은 원유 도입선 다변화를 꾸준히 모색 중이고 실제로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이 작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사이 우리나라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총 도입 물량의 80%를 넘고 있다. 지난해 역시 80%가 넘었다. 지난해 우리 정유사들은 11월까지 총 10억1831만 배럴의 원유를 도입했고 이중 중동산 원유는 82.23%에 해당하는 8억3739만 배럴로 집계됐다.
하지만 중동 의존도는 낮아지는 추세다. 2016년 중동산 원유 의존도인 86%와 비교하면 3.77%p 줄어든 것이다. 특히 하반기 들어 중동산 원유 비중은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중동 원유 비중은 74.8%, 11월은 72.9%에 그치고 있다. 우리 정유사들의 중동 원유 의존도가 낮아지는 배경은 미국, 아시아 역내 등 거래선 다원화가 가능한 여건이 확대되고 있고 중동산 원유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영향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저렴했던 중동산 원유, WTI 가격 역전
전 세계 원유 가격은 미국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중개되는 WTI(West Texas Intermediate, 서부텍사스중질유), 영국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북해산 브렌트(Brent), 중동 두바이(Dubai) 원유 등 3개 유종이 지배하고 있다. 다만 황 함량 등 품질, 주요 소비 권역의 수급 여건 등이 달라서 거래 가격에 차이를 보이는데 전통적으로 중동 두바이 원유가 WTI, 브렌트유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됐다.
우리 정유사들이 중동산 원유를 선호하는 이유는 타 유종에 비교해 낮은 가격 그리고 지리적으로 가까워 수송비가 저렴한 영향이 컸는데 그 틀이 깨지고 있다. 두바이유보다 WTI 가격이 더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두바이유 가격은 평균 배럴당 105.98달러를 기록했는데 WTI는 95.11달러로 오히려 10.87달러나 낮았다. 이후 그 폭은 좁혀졌지만 여전히 두바이 원유 가격이 높게 유지되고 있으니 값비싼 중동 원유 대신 저렴한 미국산 원유를 들여올 유인이 생긴 셈이다.
미국 걸프 연안에서 출발한 원유 수송비가 중동산보다 두 배 이상 높지만, 이것 역시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 자금’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 제도는 과도한 중동산 원유 비중을 줄이기 위해 미주, 아프리카, 유럽 등에서 수입하는 원유의 수송비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다.
미국산 원유 도입 확연한 증가세
그 결과 미국산 원유 도입이 확연하게 증가하고 있다. 셰일 원유 개발이 붐을 이루면서 미국은 2016년을 기점으로 원유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했는데 국내 정유사 중 처음으로 GS칼텍스가 2016년 말 200만 배럴의 미국산 원유를 수입하며 물꼬를 텄고 지난해에는 11월까지 총 1136만 배럴이 도입됐다. 6배 가까운 증가세를 보이는 것이다. 유럽산 원유 역시 북해산 원유인 포티즈(Forties) 유종이 지속해서 수입되고 있고 멕시코산 중질유와 앙골라산 중질유, 알제리산 경질유, 적도기니산 콘덴세이트가 도입되는 등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으로도 원유 수입처가 확대되고 있다.
아시아산 원유 도입도 늘어나고 있다. 아시아산 원유 비중은 지난해 들어 11월까지 8.6%를 기록하며 그 전 년 동기와 비교하면 1.8% 증가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원유 도입이 크게 늘어 2016년에는 200만 배럴 수입에 그쳤던 것이 지난해에는 11월까지 2334만 배럴이 도입됐다. 북미 셰일 원유 개발이 확대되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규 원유 도입선이 늘어나면서 우리 정유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정부도 원유 도입선 다변화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며 중동산 원유 비중을 낮추는 데 일조하고 있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너무 가깝게만 둘 수 없는 중동산 원유. 우리 정유사들이 도입선을 다변화한 결과, 언젠가는 ‘프리미엄’ 대신 ‘할인’을 요구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중동산 원유의 매력 때문에 거리를 둬야 하는 ‘아이러니’는 없어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