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중동 호르무즈 해협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더니, 이란이 자국에 대한 서방사회의 경제 제재에 대항해 주요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다시 위협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신입사원 시절에 겪었던 제1차 걸프전 때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1991년1월16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이라크가 5개월 전에 점령했던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저는 GS칼텍스에 입사하여 겨우 1년이 지난 신입사원이었죠. 전쟁이 발발한 날 오후 갑자기 팀장님이 부르더니 동력자원부(현 지식경제부) 비상상황실로 당직근무를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천종합청사 지하 비상상황실에 도착하니 각 정유사에서 한 명씩 야간 연락 당직을 서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매 시간마다 걸프해를 드나드는 자기 회사의 원유선 동정을 보고하는 것이 주 임무였는데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퇴근할 때는 뭔가 큰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몰려왔습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요즘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겠지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제가 회사에서 맡고 있는 일은 전세계 원유를 유조선으로 수송해 오는 것입니다. 매달 열 척의 초대형 유조선(VLCC, 2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여수에 있는 GS칼텍스 정유공장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높아지면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죠. 개인적으로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데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가장 첨예하고 드러나고, 배울 점도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
플루타크 영웅전에 등장하는 이란의 제국들은 강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아리아족은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이래 중동에서 패권국가의 지위를 유지해 왔습니다. 기원전 330년 소아시아를 너머 그리스까지 세력을 떨쳤고, 기원전 250년경에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로마와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겨룰 정도였죠. 이후 2천여 년간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고 마지막 왕조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진 팔레비 왕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란 핵시설을 공격할까? 올 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이 언제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하느냐가 국제사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란 핵개발이 가장 신경 쓰이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과 이스라엘은 매우 가까운 나라였지만 1979년 이란에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죠. 이슬람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스라엘과의 모든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적대정책을 고수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이 중동에서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국의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란의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최신형 전투폭격기를 동원한다 해도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고 돌아 오기에는 너무 멉니다. 또한 공중급유기와 벙커버스터(bunker buster)라 불리는 지하 시설물 공격용 폭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란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핵시설을 완벽히 제거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 중동전쟁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자국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수비적인 방법보다는 공격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은 어떤 곳인가?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과 오만 사이의 폭 54킬로미터의 좁은 수역으로 전세계 원유 생산량의 20%가 이곳을 통과합니다. 하루 평균 14척의 초대형 유조선이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빠져 나오며, GS칼텍스의 원유를 실은 유조선도 사흘에 한 척씩 해협을 통과합니다. 여기에 만약 기뢰(배가 부딪치거나 근처에 지나가기만 해도 폭발하는 수중폭탄)라도 설치된다면 유조선이 원유를 실으러 걸프해로 들어 갈수도 없고 원유를 싣고 빠져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실제로 충돌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이란-이라크 전쟁의 막바지 무렵인 1988년 4월 14일, 미 해군의 호위함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이 설치해 놓은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나흘 후 미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의 해상플랫폼을 공격하면서 단 하루 만에 전쟁은 종료됐죠. 이후 이란 해군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미군을 상대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현재는 19척의 기뢰 설치가 가능한 소형 잠수정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걸프 해역에 8척의 기뢰 제거함을 투입했다고 하죠.
이란이 과연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까?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미사일 발사훈련 등 연일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봉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기뢰를 설치하거나, 잠수함으로 어뢰 공격을 하거나, 이란 본토에서 미사일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설 경우 미군이 이란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까지도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게 되면 중동 원유에 의존하는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고, 이란 자신도 원유를 수출할 길이 막히게 됩니다. 이란의 수출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70%나 되기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이란 경제는 더욱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이 세계 최강 미군과의 전쟁까지 감수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죠. 걸프해의 미군 제5함대 전력은 이란 해군 전체 전력을 합친 것보다 최소 2~3배는 우위에 있다는 게 미국 안보 전문가의 견해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현실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지난해 석유 소비량은 하루 220만 배럴이었습니다. 이 중 석유화학용 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를 제외하면 하루 120만 배럴이 자동차, 항공기, 선박,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됩니다. 이 중 삼분의 일 가량을 GS칼텍스가 공급하고 있고, 이 물량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양만큼 수송하는 것이 수급부문의 일입니다. 올 3월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석유 비축량이 185일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여기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전략적 비축유에 정유회사의 원유 및 석유제품 재고가 포함되어 있죠.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우리나라의 원유가 전량 중동에서 들어 온다고 하더라도 여섯 달은 버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지난해 우리나라의 중동원유 도입 비율은 87%였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이 안에만 풀린다면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못 다닐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물론 위기 상황에서는 전국민이 단결하여 석유 소비를 최소화할 것이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국제유가는 배럴당 200달러로 뛸 것이라고 올 1월 블룸버그 통신이 예측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991년 제1차 걸프전 때도 미국이 7억 배럴의 전략적 비축유를 방출했던 경험에서 보듯, 각 국이 비축유를 방출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공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가의 안정화 여부는 전적으로 무력 충돌의 진행 경과에 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사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미국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황을 단시일 내에 종식시키면 과거 1,2차 걸프전에서 학습했듯이 유가는 급등했다 급락할 것입니다.
요즘 같이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고조될 때면 GS칼텍스의 원유수송을 담당하는 수급부문 직원들은 24시간 중동을 드나드는 유조선의 동정을 살피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며 원활한 원유수급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무력 충돌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국제 정세상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가능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