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오일(peak oil)’이라는 에너지 용어가 있다. ‘피크(peak)’는 꼭대기, 정상을 뜻하니 해석하자면 ’정점에 있는 석유’를 뜻한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인류가 유한 자원인 석유에너지를 채굴해 소비하는 과정에서 최대 매장량의 정점을 지나쳐 줄어드는 시점’을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에너지 전문가들은 ‘피크오일’의 도래를 점쳐왔고 그때마다 석유의 가채 매장 연수는 40년쯤으로 전망했다. 앞으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석유는 약 40년 정도면 바닥을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세계 최초 유정은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북서부에 있는 드레이크 유정이었지만, 정제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석유를 사용한 것은 19세기 말로 알려져 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석유를 채굴하여 사용해 왔으니 매장량은 정점을 찍고 그 끝을 보여줄 만한데, 석유 매장량은 여전히 증가 중이라는 통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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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300억 배럴 넘게 소비, 하지만 매장량은 늘어
글로벌 에너지 기업인 BP는 매년 전 세계 에너지 관련 통계를 분석 발표하고 있는데 최근 66번째 자료를 공개했다. ‘BP 에너지 통계 2017’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는 1조 7,067억 배럴의 석유 확정 매장량(proved reserves)이 확인됐다. 그 전해인 2015년 말 확정 매장량인 1조 6,915억 배럴과 비교하면 1년 사이에 0.89% 늘었다.
BP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석유 확인 매장량은 연평균 2.5%의 성장률을 보이고 지난해에도 또다시 늘어났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소비된 석유는 하루 9,655만 배럴에 달한다. 1년으로 환산하면 352억 배럴의 석유가 채굴돼 사용됐다. 지난해 우리나라도 하루 276만3,000배럴씩 총 10억 배럴 정도의 석유를 소비했다.
전 세계적으로 한 해 300억 배럴이 넘는 엄청난 양의 석유가 채굴돼 사용되는데도 매년 매장량이 늘어만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非)전통 자원개발 기술진화로 방치된 석유 캐내
지난해 석유 매장량 증가의 주요 배경은 본격적으로 경제재건에 나선 이라크 유전개발이 확대되면서 1,024억 배럴에서 한 해 사이 7.4%가 늘어난 1,530억으로 늘어난 영향이 컸다. 러시아 석유 매장량도 1,024억 배럴에서 1,095억 배럴로 6.9% 늘어났다.
채굴기술이 진화되면서 방치됐던 석유 개발이 가능해진 영향도 피크오일 수명을 늘리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등 북미를 중심으로 이른바 셰일오일(shale oil) 같은 비전통 자원의 채굴기술이 개발되면서 석유 확인 매장량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의 유전은 거대한 지하 공에 매장된 석유를 파이프라인을 꽂아 뽑아 쓰는 방식으로 채굴기술이 간단하고 생산비용도 낮다. 반면 셰일오일은 땅속 퇴적암 사이 사이에 석유가 흩어져 있어 채굴이 어렵고 생산비용도 많이 들어 방치되어 왔다. 하지만 셰일오일 층에 시추관을 뚫고 화학약품이 섞인 물을 고압으로 분사시켜 암석을 분쇄하고 물과 기름을 분리해 원유를 채취하는 수압파쇄법이 개발되고 생산비용도 낮춰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개발이 확대되고 있다.
그 결과 셰일오일 개발을 주도하는 미국은 2006년 기준 294억 배럴에 불과하던 석유 확인 매장량이 불과 10년이 지난 2016년에 480억 배럴로 63%가 증가했다. 이와 관련해 ‘피크오일’이 도래하는 시점은 방치된 비전통 석유를 채굴할 수 있는 소위 ‘피크기술(peak technology)’의 진화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라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다.
세계 최고 자원 부국과 자원 빈국에 축복이란?
BP 보고서에서 ‘석유 확정 매장량(oil proved reserves)’이 발표되는 국가는 총 49개국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동해 가스전에서 천연가스와 더불어 초경질원유인 콘덴세이트가 생산되고 있지만, 극소량에 불과해 석유 생산국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석유자원만 놓고 보자면 매우 가난한 나라인 셈이다.
우리나라와 대조적으로 세계 최고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는 베네수엘라다. 세계 원유 수급과 가격을 쥐락펴락하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더 많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확인된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3,009억 배럴로 전 세계 매장량의 17% 수준에 달한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고 자원 부국이면서도 극심한 경제난을 겪으며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려 있다. 최근에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두로 대통령이 ‘제헌의회(制憲議會)’를 출범시키면서 정치적으로도 대중적 항거 몸살을 앓고 있다. 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석유의 힘만 믿고 자생적인 산업 육성은 외면하며 대부분의 생필품과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해 왔고, 오일머니를 앞세운 지도층의 퍼주기식 복지 포퓰리즘 정책에 길들여진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폭락하면서 그간의 게으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 사이 석유 자원 한 톨 없는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자원의 부유함은 성장의 한 요소는 될망정 축복 그 자체는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