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보건 위생처럼 석유 안보의 가치를 ‘비축’ 하는 이유
양곡관리법에 근거해 정부가 비축하는 ‘나라 쌀’이 있다. ‘정부미(政府米)’로 불리는 ‘공공비축양곡’이 그것인데 수급불안이나 국가 비상 사태에 대비한 식량 안보 확보 수단이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정부가 방역 마스크를 비축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정부는 ‘감염병 예방·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마스크 같은 방역물자를 비축해야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2차 대유행에 대비해 마스크 1억장 비축 예산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석유 자원도 의무 비축해야 한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이하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석유 수급과 가격 안정을 위해 석유 비축 목표를 설정하고 비축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석유 공적 비축 현황
석유 공적 비축은 공기업인 석유공사가 담당한다. 정부를 대신해 국가 예산으로 비축 시설을 짓고 원유를 저장한다. 민간 석유 사업자들은 사업 허가나 등록 과정에서 비축 의무를 부여받는다.
석유는 비축에 앞서 별도의 저장시설이 필요하다. 위험물이고 액체 벌크인 탓에 위험물안전관리법 규정에 맞춘 저장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석유공사나 정유사가 엄청난 용량의 비축시설을 짓는 이유이다.
석유공사 육상 비축시설
석유공사 비축기지 운영 현황
석유공사는 전국에 총 9개 비축기지를 운영중이다. 원유는 정유사 인근의 충남 서산, 전남 여수, 경남 거제와 울산 등 4곳에 보관된다. 석유제품은 주요 소비지 거점인 경기도 구리와 용인, 강원 동해, 전남 곡성에, 국내 유일한 LPG 비축기지는 경기도 평택에 들어서있다.
민간 석유 사업자들은 석유사업법에 근거해 저장시설 확보 의무를 부여받는다. 정유사들은 직전 해 하루 평균 석유 판매량의 40일분에 해당하는 저장시설을 갖춰야 한다. 석유수출입업자 역시 등록 요건으로 최소 2500 ㎘를 담을 수 있는 저장시설이 필요하다.
석유 대리점 저장 설비
도소매 역할인 석유대리점과 주유소들도 법적 등록 요건으로 각각 700㎘, 20㎘의 저장시설 확보가 의무화되어 있다. 수급 위기 상황에서 500 여 석유대리점, 1만2천 여 주유소 저장시설이 전략적 비축 공간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석유공사 비축 설비는 1억4600만 배럴 규모이다. 이곳에는 9600만 배럴의 원유와 석유제품, LPG가 비축 보관중이다. 정부는 매년 석유 비축 계획을 수립하는데 올해는 원유 49만 배럴과 경유 15만 배럴을 구매하니 공적 비축 물량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원유 비축의 의무?
2013년 9월, 아랍에미레이트(UAE)는 석유공사 여수기지에 원유 200만 배럴을 비축했다. ‘국제 공동 비축 사업’ 일환으로 석유공사 저장시설에 UAE 원유를 유치하고 보관료도 받는다. 수급 비상시 공동 비축 원유는 우리나라가 우선 구매할 수 있으니 에너지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
민간 정유사들은 연간 하루 평균 내수 판매량의 최소 40일분을 의무 비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유사는 정상적인 영업을 위해 통상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운영 재고량’으로 28일분, 나머지 12일분은 일반 비축하고 있다.
원유가 정제 설비에 투입돼 석유제품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물량이 정유사 운영 재고량으로 풀이된다. 인체 심장격인 정제설비, 혈관 격인 파이프라인 속에는 우리나라가 28일 소비할 수 있는 석유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런데 원유 비축은 우리 만의 의무는 아니다. 국제에너지기구 IEA는 회원국 대상으로 원유 순수입량의 90일분 이상을 비축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IEA 기준에 맞춰 현재 110일분 이상을 비축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IEA(International Energy Agency)’는 지난 1976년, 중동 산유국 중심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에 맞서 주요 석유소비국이 발족한 OECD 산하 국제기구이다. 산유국 카르텔인 OPEC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 소비국들이 모여 상시적인 원유 비축으로 대응하고 있다.
전략적 비축은 석유 수급 위기나 가격 폭등 같은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실제로 IEA는 회원국을 대상으로 ‘IEA 비상대응계획(ICRP, Initial Contingency Response Plan)’을 운용하며 국제 석유 수급 차질이나 가격 변동성 확대에 대응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산유국 석유 공급이 줄었지만 OPEC은 침묵했다. 유가가 치솟자 IEA는 회원국에 비축유 방출을 권고하며 약 6천만 배럴이 풀렸다. 당시 우리나라도 비축유 346만 배럴을 방출했다.
1990년의 걸프전, 2005년 9월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발생한 원유 공급 차질 당시에도 IEA는 국제공조를 통해 비축유를 방출했다. 민관이 저장시설을 짓고 원유를 보관하는 일련의 과정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석유 출하 시설
코로나 19, 원유에 끼치는 영향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석유 소비가 줄고 유가가 추락하면서 원유 저장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뉴욕 상품거래소 선물 만기일, 소비 감소로 넘쳐나는 원유를 담아 둘 저장시설이 바닥을 보이면서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IEA 그리고 각국 정부가 공공 그리고 민간 영역에 석유 저장시설과 비축을 권고하거나 의무화하는 것은 다양한 비상 상황에 대비한 에너지 수급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세금 그리고 민간 기업의 투자와 비용 부담이 수반되지만 감당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당장의 부담을 이유로 회피하면 더 많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지불해야 한다.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대비해 식량, 보건 위생, 에너지 처럼 인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을 비축하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