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이야기 12 – 남한산성 소주 문화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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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술 이야기 – 남한산성 소주 문화원 이야기

 남한산성 소주 문화원을 찾아간 날은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이어서 행사를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강순구 대표의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여유가 있는 관계로 프로그램에 이미 남한산성 관광을 기획하였던 바 일정대로 진행하기로 하였지만 봄비가 그냥 살살 오는 게 아니고 내려긋는 터라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한산성을 알리기 위해 해설사는 나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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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

일정대로 우리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남한산성 행궁을 향하였습니다.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162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실제로 인조 2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습니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 길에 머물러 이용하였으며, 남한산성 행궁은 우리나라 행궁 가운데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개방되는 시간 동안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되며 시간을 맞춰가면 해설사의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지요.

전통주 해설사, 남한산성 해설
화려하게 설명 중인 해설사

해설사 선생님은 정년퇴직을 하신 분인데 향토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이곳 행궁에서 향토 알리미로 봉사 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지긋한 나이에 남다른 열정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다만 일행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가 역력하여 보였습니다. 궂은 비가 내리는데다 점심 식사 메뉴가 남한산성 소주를 반주로 효종갱이라는 음식을 맛볼 예정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니 자연 설명은 건듯건듯 들어 넘기면서 어서 점심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눈치들이었습니다.

설명하시는 해설사 선생님은 애써 고생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 수고하신 해설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효종갱은 새벽 효, 종소리 종, 국 갱을 일컫는 말로서 말 그대로 새벽 아침 해장국을 말하는데 한양 땅에 새벽이 되고 첫닭이 울면 이곳 산성에서 해장국을 만들어 한양 도성 안으로 배달을 하였다고 하니, 바로 배달음식의 효시요 배달민족으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그런 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튼 밤새 뼈다귀를 푸욱 고아서 배추 시래기를 넣어 만든 해장국은 무척이나 맛이 좋았던지 주문이 밀려 아차 하고 늦으면 맛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

봄비는 차가워서 으슬으슬 추운데다 근 두 시간 가까이 행궁을 돌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감상한지라 얼마나 속이 시렸을까요? 행궁 관람이 끝나자 마자 우리들은 남한산성 소주 문화원이 배설한 음식을 앞에 두고 감격 어린 탄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직접 만든 소주를 한 잔 가득 따른 다음에 전통주 기행의 만수무강을 외친 후 우리들은 다 같이 한 잔을 쭈욱 들이키니 독한 소주가 목 줄기를 훑으며 짜아~ 하는 느낌에 몸부림을….

뜨거운 효종갱을 후후 불면서 입에 가득 머금으니 아아! 이 한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 알겠습니까? 설명 하지 않고도 아는 것을 칸트는 선험적이라 하였고 공자님은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단계를 가장 높이 쳐주지 않았던가요?

복원 된 종루와 종, 남한산성 종
복원 된 종루와 종

자! 여기서 남한산성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하면 남한산성은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을 한 날인데요. 항복하기 전까지 47일간을 이곳 남한산성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싸움을 했던 곳입니다. 주변에는 깎아지른 듯한 산세를 따라 산성을 쌓아 산성 안쪽은 야트막하나 산성 바깥쪽은 무척 높아서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천연의 험지입니다. 하지만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성을 나가서 항복하였는데 성을 의지하고 지키는 일보다 내부적으로 일치단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유달리 절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절에 있는 승려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기 위함이었으니 승려들에게는 따로 품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점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남문 근처에 있는 개원사라는 절에 대한 전설도 소개합니다. 남문 근처에는 1986년 말에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절에서는 귀중한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조선 인조 때,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불경을 담는 궤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관가로 보냈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

 사연을 들은 인조는 “사람도 하나 없는 배가 삼개에 이른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라. 내가 보기에는 불경 궤짝 위에 쓰여진 글로 보아, 그 불경 궤짝을 우리 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시오.”라고 분부하였다. 이에 개원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보니,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불경 궤짝을 개원사로 보냈다.

 그런데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개원사의 화약고에서 불이 나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한 번 큰불이 나서 불길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불경 궤짝을 보관하던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 출처 : 네이버 자료실실

수어장대에 얽힌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서남북 네 군데에서 모두 성곽을 축조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유독 수어장대 부근의 공사만 지연되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조사한 결과 감독을 맡은 이가 공사비를 횡령한 것으로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공사 감독자를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성곽이 무너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우려 제작하다 보니 시일도 늦고 돈도 많이 들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으며, 그 후 다른 곳 성곽은 모두 무너져 버렸지만 이곳만은 끄덕 없이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급한 결론이 충성을 다한 애국자를 죽음의 길로 내몬 것이랍니다.

남한산성 입구
남한산성 넒은 입구

짧은 오전 동안의 남한산성 행궁에 대한 답사였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쳐주고 알게 해 주는 남한산성 여행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행들은 남한산성 소주 문화원에서 늦은 점심을 끝내고 얼큰해진 얼굴로 남한산성 종로까지 걸어나갔습니다. 흡사 조선 인조임금 당시로 거슬러 온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어 도보로 가장 짧은 코스의 성곽을 산책하였습니다. 멀리 서울이 보입니다. 한 때 푸른 기와집으로 모두를 덮었던 시절도 있었겠으나 지금은 높은 건물과 빌딩군, 아파트 숲이 서울을 형성하고 있네요. 말 그대로 도읍은 남았으나 인걸은 간데 없고 오늘 제가 거쳐간 자리를 훗날은 또 누가 바라 보고 있을지? 성곽의 가장 높다란 자리에 올라 ‘사철가’를 불러 봅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 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함께 한 일행들 가운데 누군가가 “얼씨구” 하면서 추임새를 놓습니다.

이렇게 봄날의 전통주 기행은 끝이 나고 저녁 무렵 인천으로 돌아 온 일행들은 그 흥이 다 하지 못한 탓인지, 가져 왔던 산성소주와 막걸리를 앞에 놓고 늦도록 잔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