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통상 압력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가운데 미국산 원유 도입이 갈등 해법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원유 수입 의존도는 100%이니 어차피 수입해서 쓸 바에 미국산을 도입하면 자연스럽게 통상 압력 수위를 낮출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미국을 정상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산 원유 구매 확대를 양국 간 통상 갈등 해소 카드 중 하나로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정상 회담지로 미국을 선택하고 지난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3박 5일 동안 방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 등을 가졌는데 문 대통령이 미국에 가져간 선물 목록에 원유 도입이 포함됐다.
GS칼텍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원유 240만 배럴, 금액으로는 약 1억1800만 달러 규모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은 중동산 원유 수입 의존도가 80%를 넘고 있어 미국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면 도입선 다변화를 통한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미국산 원유를 들여오면 자연스레 통상 압력은 줄이고 도입선 다변화를 통한 중동 의존도도 낮출 수 있으니 논리적으로는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하지만 시장의 해석은 약간 다르다.
미국산 원유 도입 논리적 근거 있지만…
전 세계 원유 시장은 3대 대표 유종을 중심으로 가격 지표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중개되는 WTI(West Texas Intermediate, 서부텍사스중질유), 영국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북해산 브렌트(Brent), 중동 두바이(Dubai) 원유가 그렇다. 이들 3대 대표 유종은 주요 품질 기준 중 특히 황 함량이 다르고 주요 소비 권역의 수급 여건 등이 반영되면서 차별적인 거래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이중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이 높고 이 때문에 정유사들의 정제 설비도 중동산 중질유에 최적화된 상태로 설계되어 있다. 중동산 원유 가격이 전통적으로 WTI나 브렌트유보다 낮게 형성되면서 상대적인 가격경쟁력도 갖추고 있는 것도 메리트중 하나다. 시장 논리에만 충실하면 지리적으로 가깝고 가격이 낮으며 정제 설비에 최적화된 중동산 원유 도입을 늘리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다만 1970년대 국제 원유 가격 급등을 초래한 제 1, 2차 오일쇼크의 발원지가 중동이었고 현재도 끊임없는 분쟁이 야기되고 있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다는 점에서 국가 에너지 안보를 도모하기 위한 정책적 도입선 다변화는 필요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미국을 포함한 비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원유 수송비와 중동산 원유 수송비 간 차액을 지원하는 정책을 통해 중동산 원유 비중을 낮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석유 가격이 자유화되어 있고 정유사 매출 중 수출 비중이 절반을 넘을 만큼 수출 전략 산업이 된 상황에서 정유사들이 원유 도입 최우선 조건을 가격 경쟁력에 맞춰 중동산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력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가 국내 정유사에 미국산 원유 도입을 늘리라고 무조건 강요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WTI유, 두바이유보다 가격 낮아졌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국내 정유사들이 미국산 원유를 무턱대고 도입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WTI 가격은 두바이 원유보다 전통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2000년 이후 세계 3대 원유 평균 가격은 상당 기간 WTI 가격이 가장 높았고 브렌트유가 그 뒤를 이었으며 두바이 원유 가격이 가장 낮았다. WTI 가격은 두바이 원유보다 배럴당 많게는 7달러에서 적게는 1~2달러까지 줄곧 높게 형성되어 있다. WTI는 황 함량이 0.45% 수준인 저유황 경질유인 반면 두바이 원유는 황이 2.13% 수준 함유된 고유황 중질유인 탓에 품질 차이에 따른 가격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해왔다.
WTI유는 중동산 원유보다 수송 비용도 두 배 이상 높고 수송 기간도 길다. 두바이유를 대신해 미국산 WTI유를 들여오게 되면 내수 기름값은 상승하고 석유 수출 단가 상승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불가피한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8년 이후 WTI유 가격이 두바이 원유 가격보다 간헐적으로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2011년 이후로는 연평균 가격으로도 두바이유보다 낮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1년 두바이유 평균 가격은 배럴당 105.98달러를 기록했는데 이 기간에 WTI유는 95.11달러에 머무르며 10.87달러나 낮게 형성됐다. 이후 그 격차는 좁혀 졌지만 WTI유 약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동산 원유보다 가격이 내려간 미국산 원유 도입을 늘릴 상당한 유인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또 다른 걸림돌들이 있다.
수송 운임 격차, 기간 등 또 다른 불리한 여건
품질 성상만으로는 중동산 원유보다 고품질인 WTI유의 가격 역전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불안 요소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WTI유 가격이 두바이유보다 낮아진 것은 중국이나 인도 등 아시아 주요국의 석유 수요가 유럽이나 미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중이고 중동 국가들이 주도하는 OPEC이 감산을 통한 유가 부양 노력에 나선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반면 미국을 중심으로 셰일 원유 개발이 붐을 이루고 본격적으로 석유 수출을 모색하면서 미국산 원유의 프라이싱(Pricing) 기준인 WTI유 가격은 약세를 보인다. 문제는 언제든 WTI유가 반등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상 운임 차이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중동산 원유가 우리나라까지 수송되는 과정의 해상 운임은 일반적으로 배럴당 1.5∼1.8 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 걸프 연안에서 출발한 원유가 한국에 도착하려면 이보다 두 배 이상 높은 배럴당 3.0∼5.5 달러가 소요된다.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쇼트커트(shortcut)’인 파나마 운하가 확장됐음에도 불구하고 원유 도입에 꼭 필요한 ‘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급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점도 장애 요소다. 이와 관련해 정유업계는 수송비 차이 등을 고려할 때 WTI유 가격이 두바이유에 비해 배럴당 10달러 이상이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경제성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WTI유 가격이 여전히 두바이유에 비해 낮지만, 경쟁력 있는 수준의 격차는 아니며 언제든지 반등해 가격 역전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유사들이 장기 계약을 맺고 미국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는 것은 여전히 상당한 리스크가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해 들어 우리나라가 수입한 미국산 원유는 5월까지 149만4000배럴로 집계되고 있다. 이 기간에 도입된 원유가 4억5535만 배럴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극히 적은 물량이다. 하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 수입된 원유가 40만 배럴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증가율은 상당하다. 또한,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 등 미국산 원유 도입에 나선 정유사들이 꾸준히 물량을 늘리고 있다.
다만 스팟성 거래에 멈추고 있다는 한계는 여전하다. 미국과의 통상 마찰 해소 수단으로 정유사들이 대의적 차원에서 미국산 원유 도입 물량을 예전 보다 늘릴 수는 있겠지만, 장기 계약에 근거한 고정 거래처로 삼는 데는 엄연한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에너지경제연구원 김재경 부연구위원은 올해 초 발간한 ‘미국의 원유 수출규제 완화가 국내 석유산업에 미치는 영향 분석’이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에서 정부 비축유 구매 확대를 권장한 바 있다. ‘미국산 원유 도입에 소극적인 정유사를 대신해 정부나 공공부문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김재경 박사는 구체적 실행 방안으로 석유 비축 업무를 담당하는 석유공사가 전략 비축유로 미국산 원유를 구매하고 미국산 콘덴세이트 구매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어차피 수입해야 할 원유, 국익을 위해 미국산을 늘려야 한다면 정부는 도입선 다변화로 정유사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수송비 차액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공공 비축유 도입을 늘리는 해법을 검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