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의 따스한 봄볕이 잔인하다, 카미유 피사로 ‘대로, 시드넘’

세계 유명 미술관과 명화를 소개하는 2019 GS칼텍스 캘린더 11월 이야기입니다.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

유럽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도시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런던에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끈 넬슨제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트라팔가 광장이 있습니다. 한때는 왕가의 정원이었던 바로 이 광장에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가 위치합니다. 1824년 설립된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입니다.

방문객 수가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큼 많아서 영국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럽3대 미술관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명예는 무료 입장이라는 조건 뿐만이 아니라,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의 수준 때문입니다. 중세 회화∙르네상스 회화∙인상파 회화 등 시대적 범위가 13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회화작품 규모로는 루브르 박물관에 뒤쳐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내용은, 맨 처음 38점의 작품으로 전시를 시작해서 현재 2,300여 점을 소장하기까지 그 훌륭한 소장품 2/3가 개인의 자발적인 기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롤모델, 카미유 피사로

내셔널 갤러리의 전경
내셔널 갤러리의 전경

내셔널 갤러리 외부 모습은 오랜 시대를 품은 듯 묵직한 모습인데, 내부 전시실 모습은 검은 대리석 기둥이나 붉은색 대리석 기둥이 미술관을 받치고 있고 벽면은 민트 색, 짙은 자주 색 등 화려하고 강렬해서 묘한 분위기를 줍니다. 작품전시는 연대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설명해주는 안내도를 저렴하게 판매하기 때문에 미술전문가가 아니어도 좋은 작품과 조우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 중에 소개할 작품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1871년작 ⌈대로, 시드넘⌋입니다. 카미유 피사로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아버지 혹은 스승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술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폴 고갱도,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도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큰 힘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작업하는 피사로를 만난 뒤에야 일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 중에 최연장 화가로서 당시 새로운 미술의 경향을 제시하기 위한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지혜와 용기를 주는 모습, 60대에 이르기까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로서의 자세 등 피사로는 여러모로 예술가들의 롤모델이었습니다.

피사로는 남태평양의 생토마 섬에서 프랑스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파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림에 뜻을 둔 25세 무렵 그는 다시 파리에 나와 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합니다. 1855년 파리 박람회 미술전에서 쿠르베, 코로, 도비니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와 외광(外光)주의를 탐구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주의 리더였던 쿠르베에게 현실을 관찰하는 시선을 배우고, 코로에게는 야외에서 그림을 제작하는 태도를 영향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피사로는 소박한 농촌풍경이든 거대한 도시풍경이든 살아있는 현실적 풍경을 바라보고, 야외에 나가 햇볕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화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1870-71년, 영국의 국민화가로 칭송받는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만나며 빛의 표현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마주하게 됩니다.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리는 역동적인 도시, 시드넘

대로, 시드넘, 1871년, Oil on canvas, 48×73cm
대로, 시드넘, 1871년, Oil on canvas, 48×73cm

카미유 피사로의 ⌈대로, 시드넘⌋ 그림 속 티끌 한 점 볼 수 없는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큰 길을 오고갑니다. 시드넘은 영국 런던의 남부 지역으로,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렸던 ‘수정궁’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피사로도 이 작품을 그렸던 해에 ⌈수정궁⌋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건축이 등장하는 구도는 유사합니다.

런던 만국박람회 당시 수정궁의 모습
런던 만국박람회 당시 수정궁의 모습

하지만 ⌈수정궁⌋은 국제 행사가 열리는 수정궁 주변의 큰 대로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왁자지껄 활기찬 느낌이라면, 주택가 모습을 담은 ⌈대로, 시드넘⌋은 당시 지어진 신식 빌라들의 집성촌이라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로의 끝에 교회건물이 등장해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합니다. 중앙대로 양 옆에 연두 빛 잔디가 카펫처럼 펼쳐져 있고, 길을 따라 들어선 떡갈나무들도 봄 햇살에 새싹을 틔워내며 하늘까지 뻗어갑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더 없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피사로는 햇빛으로 충만한 야외 풍광을 그대로 담아내었습니다. 햇살에 빛나는 풍경을 사랑하고 관찰했던 인상주의 화가이다 보니, 햇살 속 풍경을 밝은 색조로 화면에 담아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화가, 대로(大路)에 반짝이는 따스한 영광을 만끽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왜 영국에 왔을까요?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혹은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시각적 향연의 고장에 관광을 온 것일까요? 사실은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로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자 피난을 온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드넘의 모습은 사실 피사로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전쟁의 불안감은 읽히지 않습니다. 물론 피사로는 따스한 봄날의 평화를 만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런던만국박람회의 큰 성공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영국의 시드넘, 봄 햇살이 쏟아지는 대로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전쟁으로 아비규환인 프랑스를 생각하면 피사로에게 시드넘의 따스한 봄날의 풍경은 또 다른 슬픔입니다. 그는 프랑스에도 따스하고 평화로운 봄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영국은 기꺼이 ⌈대로, 시드넘⌋작품을 구입했습니다. 예술가들의 롤모델인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 게다가 작품 속에는 반짝이는 영국의 한 도시가 담겨있으니 말입니다. 영국이 바라보는 자국의 부유한 도시로서의 시드넘과, 타국으로 피난 온 화가가 바라본 피난처로서의 시드넘은 동일한 풍경임에도 서로 다른 정서적 간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일수 (미술서 작가, 전시총감독)
이일수 (미술서 작가, 전시총감독)

대중에게 그림을 통한 지적 유희와 감정적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자 지속적으로 미술서 출간, 전시기획,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작아도 강한, 큐레이터의 도구>,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등 12권 집필. 하나코 갤러리 경영 및 SBS기획전시 총감독 등 다양한 전시현장에서 전시기획 수십여 회.


2019 GS칼텍스 캘린더 ‘세계 미술관 산책’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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