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제품도 이제는 No Brand 시대?

주유소 하면 SK에너지나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같은 정유사 상표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정부가 런칭한 알뜰주유소도 이제 1000 여 곳이 넘는 대중적인 브랜드가 됐다. 인지도는 없지만 ‘홍길동 주유소’나 ‘착한 기름값 주유소’처럼 다양한 자체 상표를 고안한 ‘자가상표(Private Brand)’ 주유소들도 전국적으로 수백여 곳 넘게 영업 중이다.

자가상표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석유 역시 정유사나 석유수입사 공급 제품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정 정유사 상표 대신 자신만의 독자 상표를 내거는 이유는 시장 경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름값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상표 제약을 받지 않고 법에서 정한 품질기준을 충족하는 석유제품을 다수 공급자와 흥정하면서 기름 구매 가격을 낮추고 마케팅 비용을 줄여 저렴하게 석유를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합석유 판매 활성화의 배경

주유소 상표

알뜰주유소와 자가상표 등 혼합석유를 판매하는 수많은 주유소들이 존재하는데 정부가 혼합석유 판매 활성화를 모색하는 배경은 간단하다. 정유사 상표 가치와 자가상표 주유소의 바잉 파워를 동시에 갖춘 주유소가 소비자 편익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정 정유사 상표를 내걸고 여러 공급사 제품이 섞인 혼합석유를 판매할 수 있다면 소비자는 선호 브랜드 주유소에서 저렴한 석유를 구매하는 이중의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상표 가치가 훼손되고 소비자는 왜곡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 브랜드 대리점에서 경쟁사인 LG나 대우 제품을 판매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특히 벌크제품인 석유는 가전제품과 달리 소비자가 육안으로 상표나 품질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상표 주유소에서 혼합석유를 판매하는 것은 더 심각한 기업 상표권과 소비자 선택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

‘섞어짐’의 과정을 거쳐 한 단계 진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첨단 섬유’ 같은 화합물이라면 혼합의 좋은 사례이겠다. 하지만 생산이나 유통 주체가 모호한 성분이나 제품의 뒤섞임은 시장에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석유유통시장에서도 ‘혼합’은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정부는 석유유통 경쟁 촉진 수단 중 하나로 혼합석유 판매 활성화를 추진 중이다. 주유소에서 여러 정유사나 석유수입사 제품을 혼합, 판매하면 기름값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데 최근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설문 결과가 주목을 받고 있다.

모아주유소 품질이 걱정된다!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지난 7월부터 2개월간 20대부터 60대까지의 남녀운전자 1,500명을 대상으로 기름값 및 주유소 이용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감시단은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에너지와 관련된 전국 단위 소비자 의식 조사를 실시하고 있어 이번 설문 조사는 향후 정부 정책 결정에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먼저 감시단은 ‘석유제품을 혼합해 판매하는 주유소인 모아주유소를 이용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이용할 의향이 없는 응답자가 59.01%를 차지했다.

혼합판매주유소 석유제품 이용의향

‘모아주유소’는 석유시장감시단이 혼합석유판매 주유소 명칭을 공모해 선정한 이름인데 소비자 절반 이상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아주유소 이용이 꺼려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품질이 걱정된다’는 응답이 62.86%로 가장 높았다. ‘석유제품이 섞이는 것이 싫다’는 응답도 30.33%로 나타났다.

석유제품 혼합판매 시 주유소 표시가 필요한가?

정유사 상표 주유소에서 혼합석유를 판매할 경우 그와 관련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절대적으로 높았다. ‘모아주유소’라는 표시가 꼭 필요한가를 물었는데 82.10%가 그렇다고 답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82.99%가 ‘소비자의 알 권리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해석하자면 소비자들이 정유사 상표 주유소를 찾는 이유는 해당 정유사가 공급하는 석유와 각종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서이며, 상표 주유소에서 혼합석유를 판매한다면 소비자 구매 선택권을 위해 해당 사실을 알리는 표시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유사 상표는 ‘석유 공급자’ 상표

혼합석유 이슈가 부상될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해시태그(Hash Tag, #)는 정유사가 공급하는 브랜드 제품의 ‘정통성 (正統性)’이다. 정유사 정제공장은 울산과 여수, 대산 등에 산재해 있는데 일부 정유사들은 경쟁 정유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계열 주유소에는 현지 정유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서로 교환해 공급하고 있다.

물류비 절감 때문인데 다만 교환 제품 유통에 앞서 정유사 고유의 각종 첨가제 등은 별도 과정을 거쳐 혼합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제품 교환 행위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정유사 단계부터 석유가 혼합되면서 상표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주문자 의뢰로 생산되는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방식처럼 상표권자와 생산자가 동일하지 않은 수많은 제품들이 유통되고 있고 정유사 상표도 ‘석유 생산자 상표’ 보다는 ‘석유 공급자 상표’로 해석되어 왔다.

또한 상표에는 제품 품질과 A/S에 대한 보장, 법률적 분쟁에 대한 책임, 멤버십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 가치 등이 포함되어 있어 공급자 단계의 석유 혼합 행위가 상표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배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브랜드를 보호하는 것이 소비자 선택권을 보호하는 것

정부가 이른바 제조물책임법(Product liability, 이하 PL법)이라는 것을 제정해 제품을 직접 생산한 업자는 물론이고 수입업자나 OEM 방식 상표권자가 공급, 유통한 제품의 결함에 대한 배상 책임 근거를 규정하고 있다. 제조물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를 소비자가 쉽게 구제받을 수 있도록 책임소재와 방법을 명시한 것인데 정유사들도 PL법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이에 따라 정유사 상표 주유소에서 가짜 석유나 품질 불량 제품이 판매될 경우 1차적인 책임은 정유사가 떠안게 된다.

하지만 소매 단계에서 특정 정유사 상표를 도입해 놓고 여러 공급사 제품이 혼합된 석유를 판매하는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 제품 결함이 발생할 경우 정유사와 주유소 누구의 책임인지를 가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1차적인 품질 책임은 주유소의 몫이고 소비자는 개별 주유소에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유사 주유소를 갈 것인가 아니면 자가상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것인가는 브랜드에 함축된 다양한 가치를 살 것인가 아니면 값싼 기름값에 끌릴 것인가와 관련해 전적으로 소비자가 선택할 몫이다.

소비자들은 역시 현명했다. 석유시장감시단의 설문 조사에서 다수의 소비자들은 정유사 상표로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여러 제품이 뒤섞인 석유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였다. 만약 이 같은 판매행위가 허용되더라도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 혼합석유를 판매한다는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는데도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도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다. 소비자 선택권이 제약되지 않는 다양한 길을 만들어 놓고 있다. 메이커 브랜드 매장이 곳곳에 문을 열고 있지만, 가전제품은 하이마트나 전자랜드 처럼 다양한 상표 제품을 취급하는 양판점 브랜드가 성업중이고 석유 유통은 수많은 자가상표 주유소들이 영업하면서 기업 브랜드 가치는 보호받고 소비자 선택권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정유사 주유소를 갈 것인가 아니면 자가상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것인가는 브랜드에 함축된 다양한 가치를 살 것인가 아니면 값싼 기름값에 끌릴 것인가와 관련해 전적으로 소비자가 선택할 몫이다.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의 혼합석유와 관련한 이번 설문 결과는 그래서 소비자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만들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 콘텐츠는 지앤이타임즈(석유가스신문)의 협력으로 제작된 콘텐츠입니다.


industrial writer GScaltex 에너지, 에너지칼럼
지앤이타임즈 김신 발행인

전북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에너지 분야 전문 언론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고 있는 에너지 분야 전문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