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는 비오는 날의 여수여행!!
여행과 비. 보통은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모처럼 큰맘 먹고 나선 길에 비가 내리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테고. 그런데, 막상 다녀보면 그게 아니다.
나 역시 처음엔 비오는 날 어딘가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산을 써야 하니 귀찮고 물이 튀니 옷은 젖고 온몸이 눅눅해지니 불쾌해지는 감정의 수순의 밟는 게 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며 깨닫게 되었다. 비가 오는 날만큼 여행하기 좋은 날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오는 날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래서 여유로울 수 있으며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그래서 여행의 여운도 길게 남는 법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물리적 어려움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한나절의 축축함을 감수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요즘 나는,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하루 회사를 쉬게 된 날, 운 좋게도 비 예보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의 살림과 육아에 대한 보상으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짐짓 피곤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읍소를 했더니, 선뜻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일기예보에서 빗방울 그림을 보자마자 떠올렸던 곳은 여수. 내가 살고 있는 통영과 많이 닮아 있기에, 아내에게 아기를 맡기고 혼자 맘껏 돌아다녀도 죄책감(!)을 덜 느낄 수 있는 곳. 게다가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두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으니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목적지로 참 좋은 곳이다.
여수에 처음 갔던 게 2004년이었던가. 일 때문에 찾은 그곳은, 참 아름다웠다. 따가울 정도로 밝게 빛나던 여름 햇살 덕분이었는지 도시는 산뜻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음식들이라니! 어떤 식당에서든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 같은 기운은 참으로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니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이순신대교를 넘는 내내 무얼 먹을까 궁리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내가 처음 도착한 곳은 흥국사였다. 흥국사였다.
비가 오기전 가벼운 산책으로 좋은 흥국사
비가 오기 직전에는 숲 속으로의 가벼운 산책이 좋다. 습도가 높아지고 대기의 흐름이 정체되어 있는 사이, 풀내음이 사람 키 높이 정도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게다가 그런 숲 속에 아담한 절집이 있으면 여행을 시작하는 첫 코스로 더할 나위가 없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흥국사는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다만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에 이르렀을 무렵, 여기저기 부려져 있는 자재들을 보고서야 석탄일을 맞이해 작지 않은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허탈해지긴 했지만 대웅전 뒤편에 소담스러운 들꽃처럼 자리 잡고 있는 팔상전에 오르고 나니 마음은 다시 평안을 얻었다.
아무렇게나 담장을 뒤덮고 있는 넝쿨과 그것을 배경으로 진하게 피어 있는 꽃들, 그리고 부처님 시선이 닿을락말락한 곳에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것 같은 자목련까지, 그곳은 존재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피안(彼岸)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속세의 인간이니 그곳에만 머물 수는 없는 일. 게다가 곧 비가 내릴 수도 있으니 좀 더 비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고소동의 벽화마을.
시선이 머무는 곳, 고소동 벽화마을
그렇다. 벽화마을로 가장 유명한 동피랑이 있는 통영에서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이 또 다른 벽화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성된 지 몇 해 되지 않은 고소동의 벽화마을이 특이하게 보일 이유는 없었다.
실제 그곳에 그려진 그림들이 통영의 그것보다 낫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동의 벽화마을에는 정감이 있었다. 동피랑은 이제 마을이라기보다 관광 핫스팟으로 변해버렸기에 주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명동 같은 느낌이 든다.
유동인구는 엄청나지만 실제 거주자로 등록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그런 곳 말이다. 고소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비록 벽화의 완성도는 아쉬운 부분이 있을지언정 어쨌거나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에 나는 아늑해졌다.
비가 내리는 고소동의 벽화마을은 얼마나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시멘트벽에 빗방울이 스며들어 그림이 더 선명해지는 과정을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하늘은 묵묵부답이었다. 비를 더 기다릴까 고민을 하다 배가 고파져 우선 시장으로 향했다. 지난 겨울, 취재 때문에 한 번 다녀온 교동시장과 수산시장은 통영에 살고 있는 내게도 여전히 흥미로운 곳이다.
여수 수산물시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물론 통영도 빼놓을 수 없는 수산물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지만 여수의 시장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통영에서는 볼 수 없는 군평선이(금풍쉥이) 같은 고기들도 볼 수 있고 조개들의 종류 역시 통영보다 다양하며 무엇보다 위엄 넘치는 삼치들이 한 가득이다.
보통 ‘고등어보다 조금 큰 어종’으로 알기 쉬운 삼치. 하지만 사실 남해의 시장에서는 1m 이상의 몸체를 자랑하는 것을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나 역시 통영 중앙시장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치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
여수 수산시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선하고 다양한 해산물들!!
하지만 보는 것보다 먹는 게 더 시급했다. 어지간히 돌아보고 난 후 교동시장 근처에 있는 유명한 서대횟집을 찾아갔다. 집에 있을 아내와 함께 먹기 위해 포장을 부탁했다. 기다리는 김에 아예 상을 차지하고 앉아 아구탕을 시켰다.
얼래, 탕인데 붉은색이네? 통영에서는 대구나 물메기 같은 어종으로 탕을 끓이면 대게 맑은국물인데 반해 이곳에서는 고춧가루로 양념을 한 국물이 나오는 게 이채로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맛이 좋으니 가타부타 따질 이유야 없는 일. 게다가 양념을 하면 할수록 맛이 없어지는 통영 음식과 달리 강하게 간을 했음에도 맛이 무너지지 않는 그 오묘한 비법에 감탄을 하며 나는 금세 그릇을 비웠다.
여수 교동시장 맛집, 서대횟집에서 맛보는 아구탕!
다시 차에 오를 때까지도 하늘은 꾸물거리기만 할 뿐 빗방울 하나도 내려주질 않았다. 이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시동을 걸고 엑스포해양공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2년 전, 엑스포 기간 동안 그곳에 갔을 때는 비가 참 많이도 내렸던 터였다. 그리고 사람은 빗방울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붐볐다. 하지만 다시 찾은 그곳은 이제 공간 자체가 텅 비어 보였다. 전시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에 재활용 방안이 아직 완벽하게 수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엑스포 해양공원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적막한 몇몇 건물을 지나다 보니 빅오쇼를 재개했고 전망대가 영업중이라는 안내문구를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아쿠아 플래닛이었다.
여전히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아쿠아 플래닛
행사 기간 동안에도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던 곳을 아무런 지체 없이 들어서려니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졌지만, 부쩍 자란 벨루카를 보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수중동물들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아쿠아리움 관람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여러 수중동물들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반가웠다. 한가롭게 오랫동안 그 모습들을 볼 수 있어 좋기도 했다. 그리고 되돌아 나왔을 때, 드디어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여행이 완성되었음을 실감했다.
여행의 끝, 카페에서의 느긋하게 들리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물론 처음부터 비와 함께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그에 곁들여 달콤한 빵 한 조각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에 나는 꽤나 흡족해졌다. 많은 경우, 여행에서 카페를 제외하기 마련인데,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다.
낯선 동네의 낯선 카페에 앉아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낯선 사람들의 낯선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여행을 실감케 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카페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수밖에 없다.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비를 핑계로 더 오랫동안 ‘뭉갤’ 수 있으니 말이다.
좋은 재료는 좋은 음식을!
한참이나 멍하니 카페에 앉아 있다 제법 내리는 빗줄기를 헤치고 집에 돌아와 포장한 서대회를 내밀자 아내는 금세 슥슥 무쳐 밥상에 올려주었다.
아아 이 강렬한 맛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서대의 맛이라니!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끓여놓은 된장찌개와 함께 서대회를 먹노라니 마치 숟가락에 무한동력을 달아놓은 것 같았다. 끊임없이 밥과 찌개가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오오 위대할손 마눌님. 만세 만세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