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하는 봄날의 여행, 남해에 다녀오다.

언젠가는 떠날 봄날, 남해 여행, 부모님 여행

언젠가는.. 떠날 봄날의 여행 – 부모님과 함께 할 남해 여행
 남들은 내게 “통영처럼 좋은 데 사니 다른 데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겠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어디에 살아도 거기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게 되면 곧 낯선 곳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봄이 되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떠나라며 등을 떠미는데 버티지 않고 얌전히 있을 사람이 어디 그리 많겠는가. 하지만 결혼을 하고 거기에 아이까지 생긴다면 움직임이 진중해질 수밖에 없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슬슬 봉오리가 도톰해지는 봄꽃을 보며 나는 열심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명분이 있어야 남해로 갈 수 있을까. 무엇이 내 잠깐의 일탈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며칠을 궁리한 끝에, 아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 후 아내를 회사까지 출근시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남해여행

마침 차는 아내의 회사에 도착했고, 마침 출근 시각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기에 아내는 대화를 더 잇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남해로 방향을 잡고 조금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통영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삼천포대교공원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짙은 안개가 다리 건너의 섬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가슴은 더욱 설렜다. 안개는 원래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내내 울리지 않았던 전화는 여전히 잠잠했다. 어제 내게 말했던 것처럼 아내는 오전 내내 회의 중일 게 틀림없다. 자, 그럼 어디부터 가볼까나.

그런데 솜사탕 같은 안개를 뚫고 삼천포대교를 느긋하게 지나는 동안, 문득 정말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계시는 두 분이 통영에는 몇 번 내려오셨지만 그 외의 인근 지역으로 여행을 가보신 일은 없었기에, 나는 정직한 가장이자 부모님을 모실 줄 아는 아들이 되어봐야겠다 생각을 했다.

 

멸치요리 전문점

 

그래서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멸치요리전문점이었다. 아내에게 뒷덜미를 잡힐 것도 아니었는데, 운전을 하는 내내 내 몸에 서려 있던 긴장이 풀리자 배가 고파오시 시작했던 것이다.

멸치구이

사실 전에도 왔던 곳이라 그 맛에 있어서는 의심할 바가 집. 다만 식사는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한 것들이 많기에 이번엔 간단히 멸치구이만 먹기로 했다. 주말 등 사람이 많이 붐빌 때는 주문이 불가능하기에 이런 여유로운 날 먹기엔 더 없이 좋은 메뉴다.

멸치 회무침

물론 다른 메뉴들도 부모님이 드시기에 좋다. 서울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생멸치로 만든 회무침과 김치찜, 구이 등은 봄바람 따라 떠나려는 입맛을 붙잡아 두기에 훌륭한 음식들이니까.

편백나무숲

 

배를 채우고 향한 곳은 편백휴양림. 평일이라 여유롭기 이를 데 없는 길을 달려 도착하니 아직 다 걷히지 않은 안개에 피톤치트가 잔뜩 섞여 숨을 쉴 때마다 진한 나무향이 온몸을 훑고 지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쁜 일이라곤 전혀 없는 상태였으니 숲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평상에 아무렇게나 앉아 그저 심호흡만 해도 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너른 편백숲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야 미리 방갈로를 예약해 숙박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한 일. 그저 산책을 하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도 좋은 곳이니 예약사이트에서 튕겨져 나왔다 해서 이곳을 목적지에서 제외할 필요는 없다.

 

남해 독일마을

게으른 산책을 마치고 향한 곳은 독일마을.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이 간호사와 광부로 독일에서 젊음을 바친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조성된 이곳은, 하지만 이제 하나의 관광 아이콘이 되었다.

남해 독일마을

실제 ‘독일마을’의 목적에 맞는 곳은 언덕의 꼭대기 부근에 모여 있고 요즘은 펜션과 카페 등이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론 그런 편의시설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아담한 공간에서 남해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곳도 있으니까.

방조어부림

독일마을에서 5분만 차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이다.

파도와 바람을 막고 물고기를 유인하는(물고기는 나무의 녹색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한다.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방조어유림防潮魚游林이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제는 어부림이라 부르고 있다.) 역할의 숲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니트나무, 팽나무, 이팝나무가 서 있고 그 사이로 데크가 곱게 깔려 있어 이제 조금씩 관절에 무리가 느껴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기에 더 없이 좋다.

하지만 남해 바다와의 만남을 이곳에서 마무리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수평선을 왼쪽으로 끼고 달리는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송정해수욕장(지금은 남해 솔바람해변으로 불린다)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기도 하다.

솔바람해변

아울러 올 여름이면 첫 돌을 지나게 될 아기가 생애 최초의 해수욕을 경험하게 될 곳이기도 한 솔바람해변은 어느 곳보다 곱고 너른 백사장이 아름답다. 수심이 낮은 것 역시 아기와 함께하기에 좋은 조건. 당연히 파도도 심하지 않다.

남해, 해변

이런 곳에서 아기와 함께 여름을 보내게 될 것이라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며 해변을 걷는 상상을 하니 괜히 아득해지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두 분의 손을 잡고 해수욕장을 찾던 기억도 문득 되살아났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를 키우시던 두 분의 마음을 이제는 내가 내 아기를 통해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아내의 퇴근시각이 다가올 때까지 여전히 떠나질 않았다.

나를 긴장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훤한 아내는,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아기를 재우고 난 뒤에야 내게 물어왔다.

그 후 아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종종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언제쯤 한 번 내려오실 계획이 없느냐 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