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보는 우리 역사 – 최제우와 최시형의 리더십과 팔로워십
오늘날 우리 사회에 위대한 리더가 없다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위대한 팔로워가 부족하다는 것인데요. 모두 리더의 잘못에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나부터 변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조직에서 대부분 사람은 리더이자 팔로워입니다. 그런 점에서 팔로워로서의 성공은 리더로서 성공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귀감이 될만한 훌륭한 사례를 통해 리더와 팔로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봄(見)’에 보는 우리 역사의 생명력
3월, 봄입니다. ‘봄(見)’, 무엇을 봐야 할까요? 동토(凍土)에서 솟아나오는 새싹을 보는 것처럼, 삭풍을 뚫고 나온 거센 생명의 폭풍이 우리 역사에 있었음을 봐야 할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이 땅 지축을 뒤흔드는 민중혁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세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나라가 식민지하에 있었지만, 전국적인 유혈혁명이 일어난 예는 조선의 3월 민중혁명이 유일합니다. 3월 혁명은 한국사의 반전을 일으키며 일제를 두렵게 했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 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3월 혁명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요?
동학, 그리고 최제우와 최시형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바로 3월 혁명의 젖줄입니다. 또한, 3월 혁명을 이끈 최고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1861~1922)은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칭) 3세 교조입니다. 19세기 조선은 안동 김씨 등 특정 문벌의 노론일당독재 아래 백성의 깊은 신음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노론일당독재의 부정부패, 고혈을 쥐어짜는 궁핍, 엄격한 신분차별과 여성차별,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마침내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0~1864)가 창도했습니다. 최제우는 부친 최옥이 방물봇짐 장수인 한씨를 취해 태어난 서자입니다. 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났듯이 최제우는 서자라는 낙인을 받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는 15세에 부친을 잃었고, 벼랑에 놓인 고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3년 상을 치른 수운은 19세(1843) 전후에 집을 나서 세상을 주유했습니다. 민중의 삶을 속속들이 보고 체험하며 명상과 고행에 전념하는 광야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36세가 되던 1860년 4월에 종교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수운은 순수한 신앙보다는 민중과 함께 현실의 모순 구조를 혁파하려는 사상체계를 전개했습니다. 수운은 깨달음을 얻은 지 3년 만에 민중의 아버지가 되어 동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고 확산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동학을 믿으면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나라를 안전하게 한다.”는 말이 백성에게 들불처럼 옮겨졌습니다. 백범 김구는 다음과 같이 동학에 입도한 동기를 밝혔습니다.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 씨의 운수가 진(盡)했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海州)의 과거장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최제우는 사학(邪學)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1864년(고종 원년) 3월 10일에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최제우가 민족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사회의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해야겠다는 강한 욕구와 의지를 갖추고 현실혁파에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권위를 절대화하는 모습은 결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도통을 전수한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하나의 이기(理氣)이다. 사람이 곧 하늘 덩이요, 하늘은 만물의 정기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사람이 없다.”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가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봤다고 해서 우주에서 인간만이 존귀하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주의 만상(萬象)이 모두 하나요, 함께 존귀하기에 우주의 한 부분인 인간도 함께 존귀하다고 봤습니다. 최제우의 수제자 최시형은 5세 때와 12세 때에 부모를 잃었습니다. 17세에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다 1861년, 34세에 동학교도가 되었습니다. 수운이 처형당하자 이때부터 30여 년을 도망자 생활을 하며 동학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동학 접주였던 백범 김구는 최시형이 ‘사람이 한울이다’는 평등사상과 여성해방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내건 폐정개혁 12조는 최시형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의 그릇을 보고 그에게 해월이라는 호를 내려 주었고 도통을 전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른바 첫 공을 이룬 사람은 갈 것이다. 이 운은 반드시 그대에게서 나올 것이다.
이후로 도의 일을 신중히 간섭하여 나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
최시형은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최제우와 그의 가족에게 옷과 쌀과 돈을 보냈습니다. 그는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밭을 일구고 나무를 하고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거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하신다’고 말한 해월은 방방곡곡 옮겨 다니면서도 새로운 장소에 반드시 나무를 심고 멍석을 내었습니다. 누군가는 쓰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1898년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처형될 때까지 해월 최시형은 어린이는 물론 그 누구에게라도 겸손하게 배웠습니다.
해월이 공포한 「내수도문」(內修道文)중에는 이러한 내용도 있습니다.
(1) 집안 식구를 한울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마라.
(4) 사람이 오거든 한울님이 온다 하라. 어린 아해를 때리지 마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라.
(6) 다른 사람과 시비하지 마라. 이는 한울과 시비하는 것이니라.
최제우와 최시형의 리더십과 팔로워십
리더는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무는 땅 위에 있으면서 하늘을 향합니다. 그리고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죠. 리더의 꿈과 비전은 커야 합니다. 하지만 항상 현실에 발을 딛고 시대의 흐름을 주시하며 깊숙한 내면의 세계에 침잠해야 합니다. 최제우와 최시형은 개인적인 ‘자아발견’이나 종교적인 수련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을 고민하고 통찰했습니다.
리더십은 시대의 흐름을 꿰는 통찰과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시대정신과 현실감각, 역지사지하는 감성과 직관, 치열한 사유력과 열린 태도가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등을 궁극적인 사유의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던져야 합니다.
최제우는 광야에서 자연과 사물, 인간이 주는 배움을 따랐습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움직인 최제우의 리더십은 이같이 겸허한 팔로워십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천애 고아 최시형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최시형도 지극히 최제우를 섬겼고,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3.1 민중혁명의 지도자 손병희는 최시형을 생애를 걸고 따랐습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팔로워십이고 팔로워십의 핵심은 리더십임을 이분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전제하고 상호 보완해야 리더십과 팔로워십은 본연의 생명력을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합니다. 이런 마음과 태도를 갖추는 자면 그 자리가 어디든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지금 내가 한순간 상상하고 사고한 것이 사물을 보는 시각을 영원히 바꾸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로운 꿈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리더 그리고 팔로워로 우뚝 서시실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