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맞춤형 참모 – 고려의 킹메이커 이제현

 

역사에서 배우다5_ 시대를 앞서간 맞춤형 참모 이제현

참모란 보스(CEO)에게 충성을 바치며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보스가 성공하게 돕는 중요한 인적 자원입니다. 실력 있는 보통 참모들은 한 명의 보스에게 충성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참모는 모시는 보스나 CEO가 바뀌어도 그들에게 충성하며 신임을 독차지합니다. 고려 말 이제현이라는 인물은 7명의 군주를 모시면서 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은 전형적인 참모로 역사의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요즘 기업식으로 따져서 말한다면 참모의 첫 번째 고객은 누구일까요? 바로 CEO입니다. 옛날로 치면 군주인 셈인데요. 이제현은 바로 자신의 첫 번째 고객인 군주를 일곱이나 바꿔가며 대를 이어간 보기 드문 충신이었습니다. 고려가 원나라 지배 하에 있던 어둡고 괴롭던 시절,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등 무려 일곱 명의 군주를 보필하며 오로지 충직한 참모이자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 격변기에 왕의 측근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군주들을 모시면서도 단 한 번도 유배를 당한 적 없이 완벽한 참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냈습니다.

 

 

고려시대 최고의 참모 이제현
무려 7명의 왕을 보좌한 고려시대 최고의 참모, 이제현

 

글로벌리즘을 발휘하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정세에 밝은 자가 리더가 됩니다. 고려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현은 충렬왕 27년 15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병과 과거에 합격하고 예문춘추관, 판관 안렴사 등의 여러 자리를 거치며 정치적 경력을 쌓아나간 다음, 뒤를 이은 충선왕 시절 왕의 눈에 쏙 들 정도로 참모의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부창부수라고,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일했기에 왕의 신임이 남달랐고, 그랬기에 충선왕이 왕위를 충숙왕에게 전하고 태위의 관직으로 원나라 서울인 연경에 머물러 있을 때 이제현을 원나라로 불러냈습니다. 이제현이 들어가자 연경 땅에는 이미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요수, 염복 (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제현의 학문이 워낙 뛰어나고 크게 발전하자 요수 등 원의 학자들과 실력을 겨루며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당시 원나라는 역사 이래 가장 큰 영토를 장악한 칭기즈칸의 후예가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모든 경제와 문화와 과학과 학문의 중심이 원나라 연경에 몰려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들과 겨뤄 한국인이 낫다고 높은 평가를 받은 격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중국 땅을 휘 둘러보며 견문을 크게 넓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지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글로벌 리더로서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는 실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논리적인 글로 나라와 군주를 구하다

1320년(충숙왕 7년)에 원나라 환관의 참소로 충선왕은 토번(吐蕃, 오늘의 티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연경에서 무려 1만 5천리 길의 먼 거리로 귀양간 왕을 두고 재상들이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져 겨우 호위 무리 18명만 왕을 따랐습니다. 그 때 이제현은 왕의 본가를 지키고 있었는데 3년의 세월이 지나도 왕이 돌아오지 못하자 장문의 글을 써서 원나라 승상 배주와 원랑중에게 올렸습니다. 이제현의 글이 얼마나 심중을 움직였던지 그 길로 승상이 천자를 만나 충선왕의 귀양지를 도성과 가까운 감숙성 타사마(朶思麻)로 옮겨 주었습니다.

충선왕을 이은 충숙왕 10년(1323년)에는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한성(省)으로 만들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제현은 고려 정부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분격하고 스스로 글을 지어 원나라 조정에 항의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는 고려 땅이 원나라에 넘어가면 다시는 한반도에 자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제현은 우리나라가 강산이 좁고 국토의 7할이 산림과 천한 땅이라 세금을 매겨도 거둬들이는데 돈이 더 들 것이라는 점과 중국에서 먼 곳이고 백성은 고지식하며 언어도 달라 원나라의 행성이 되면 민심을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등을 꼽으며 논리적인 글로 원의 조정을 설득했습니다. 그의 글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이 일은 없던 일로 되었습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정승 조적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충숙왕의 장자 충혜왕이 달려들어와 조적을 쳐 죽였으나 원나라에서 그를 잡아 소환했습니다. 이제현은 이 때 원나라 연경에 가서 왕을 놓아달라고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말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나는 내가 우리 왕의 신하됨을 알 뿐이다.”라고 외친 후 단숨에 격정의 필체로 글월을 써서 원제에게 왕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글이 질서정연하고 이치가 옳으니 어쩔 수 없이 충혜왕을 풀어주었습니다.

 

점진적인 개혁으로 나라를 바꾸어가다

예나 지금이나 조급증이 사람을 망칩니다. 조직의 간부들은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일곱 군주에게 충성하면서 이제현은 나라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릴 때 서두르거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점진적 개혁의 완수’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현실에 굳게 바탕을 두고 이상을 조금씩 실현해 나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동아시아 역사의 교훈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의 실력이 정말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공민왕 때였습니다.

공민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먼저 왕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왕은 왕위 교체로 발생할지도 모를 과도기 정치적 변화에 대처하라고 지시했고, 야심 찬 22세의 젊은 공민왕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은 반면 자신의 경륜은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자로 명망이 높은 65세의 원로급 재상 이제현을 곁에 두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현은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왕명을 받은 그는 즉시 인사정책을 통해 실력 없거나 부패뇌물의 혐의가 있거나 추문이 있는 자들을 가려 정치 일선에서 퇴장시켰습니다. 당시까지 득세하던 덕령공주의 측근과 충정왕의 외척 세력이 모두 숙청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정치권의 반발이 심해지자 미련 없이 기득권을 버리고 후학들을 키우는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사심 없이 군주를 보좌해 왔던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단호한 사퇴였습니다.

그는 후학을 가르치면서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 대학자로 키웠고 ‘역옹패설’ 등 의 작품집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후일 유성룡은 ‘덕행, 공업, 문장의 삼불후를 갖춘 인물’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절제와 인내로 보스를 섬기다

고려는 1259년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한 1356년까지 97년간 실질적인 느슨한 식민지 국가체제였습니다. 이제현은 원 간섭기의 거의 전 시기를 온 몸으로 부딪쳐 가며 살았으나, 방황하던 고려 백성과 권신들을 잘 리드하며 흔들리지 않게 결집시켰습니다.

이 시기 그가 모신 7명의 군주들은 원나라의 간섭을 크게 받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았던 군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고려 조정안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원나라와 그런 대로 균형을 이룬 것은 이제현의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성급한 말과 조급한 내색, 그리고 음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조심한다는 말이 그에게 늘 어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군주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제현의 인품에 반해 그를 존경했습니다. 절제와 인내가 조직의 참모들이 가져야 할 덕목임을 그는 몸소 가르쳐 역사의 교훈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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