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다1 – 최고의 리더를 만나다. 세종대왕의 리더십
우리는 크고 작은 조직에서 리더를 만나고 혹은 리더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새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올바른 리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는 가운데, 나라와 회사 그리고 곳곳에서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리더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최고의 리더로서 오늘날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세종대왕, 그의 리더십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항목별로 짚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세종은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세종의 두뇌집단이었던 집현전에는 학사들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한글을 창제하고, 천문학과 역법을 세계수준으로 발전시키고, 법을 정비하고, 과학발명을 하고, 번역을 하고, 아악을 정비하고, 그리고 오늘날의 연구소처럼 프로젝트를 수도 없이 수행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명쯤 있어야 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세종 재위 32년 동안 이 많은 업적을 이룩한 학사들은 연인원(한번이라도 실록에 이름이 나오는학사들을 다 세서) 96명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많았던 때가 한글창제 시점으로 30명이었고 한글 프로젝트가 끝나자 구조조정을 감행해 20명으로 줄였습니다. 즉, 20~30명의 전문연구원들을 데리고 32년 동안에 그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는 것은 엄청난 효율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재상도 있고 다른 관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상이라고 해봐야 세종 때를 통틀어 15명에 불과했습니다.
소수로 큰 업적을 내기 위해서는 베스트를 뽑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사로 뽑혔던 인물들은 대개가 과거시험 문과에서 1, 2, 3등을 한 수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밤낮 없이 뛰었습니다. 임금이 너무도 많은 일들을 벌여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경제학 박사가 연구소에 들어가면 경제문제만 다루지만,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전공이 따로 없었습니다. 오늘은 천문학, 내일은 법, 모레는 또 군사문제 등 전천후 역량을 요구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재상들 중에 “집에 가도 사모관대를 풀어놓고 자본 적이 없다.”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둘째, 세종은 항상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했습니다.
한글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 그 예 입니다. 당시 말은 오늘날처럼 한국말로 하는데 그 말을 옮겨 적는 것은 한자로 해야만 했습니다. 상상해봅시다. 누군가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곧바로 전부 영어로 적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세종이 왕위에 올라보니 백성과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었습니다. 백성의 90% 이상이 한자를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백성들 간에도 각종 계약을 할 때면 싸움과 고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말로 약속한 것과 글로 적어놓은 계약 문구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문학과 역법은 농사를 짖는데 있어 절기를 정확히 맞추는데 필수지식이었고 해시계와 물시계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효율화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이 몇 가지 예에서처럼 세종은 항상 근본에 도전했습니다.
오늘날의 조직원들이 하는 업무를 보면 많은 것들이‘무차별 영역’(zone of indifference)에 속하는 업무들입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또 누가 하든 별로 상관없는 업무를 가지고 괜히 시간과 열정을 소모합니다. 이제는 세종처럼 ‘근본’ 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셋째,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계급을 뛰어넘는 ‘토론’이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했던 첫마디가 “의논하자”였다고 합니다. 토론을 하는데 있어서는 상하가 따로 없는 치열한 논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불교배척과 한글사용 반대에 앞장섰던 최만리와 세종의 논쟁은 그야말로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간 대 인간의 논쟁이었습니다. 급기야 최만리는 ‘고개를 들어 임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언성을 높여’ 반대논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무례한 부하를 어떻게 다룰까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토론과 논쟁을 하는 자리에서 세종의 첫마디는 한결같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높은 사람 앞에만 가면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것일까요? 조상들의 토론지향 DNA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윗사람에게 물어보면 자신은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는데 아랫사람들이 너무 눈치만 본다고 할 것이고,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윗사람이 너무 권위주의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짚어봐야 할 때입니다.
넷째,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세종은 매우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자연히 책 읽을 시간이 모자랐는데 그 와중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책을 읽었습니다. 사실 세종은 천재였습니다. 다음은 세종의 고백입니다
이런 비범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번 책을 잡으면 30번에서 100번을 읽었습니다. 당시 책 종류가 모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읽으면서 생각하고 또 뒤집어 생각하고 하면서 실용적 아이디어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신하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쉴새 없이 떨어지는 과제를 소화하느라 책 한 줄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박팽년이 나섰습니다.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계발을 해야겠습니다. 쌓아놓은 내공도 다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1년씩 직무를 떠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던 ‘사가(賜暇)제도’입니다. 오늘날의 안식년 제도라고 보면 됩니다. 세종은 매사에 바닥까지 분석하여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다양한 지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