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도 기운이 있습니다.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콘크리트 건물만 가득한 도심이 아닌 산세, 물세, 지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랫녘의 땅을 밟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곳만의 기가 느껴지지요. 경상남도 하동은 특히나 그 정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고장입니다.
지리산의 최남단에 위치해 장엄한 기운이 꿈틀대고 있으며, 전북 진안에서부터 발원하여 600리를 달려온 섬진강의 청청한 기운까지 조화를 이룹니다. 강을 끼고 펼쳐진 드넓은 평야는 또 어떤가요. 넉넉하고 푸근한 품까지 자랑하지요.
하동을 제대로 만나려면 직접 땅을 밟으며 그 기운을 느껴봐야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그 강렬한 기운에 이끌린 문인들이 하동을 배경으로 써내려간 문학작품과 함께해 봄은 어떨까요. 단언컨대 하동 문학여행은 하동의 깊은 속살과 미세한 주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을 선사할 것입니다.
평사리 어귀에서 시 한 수 읊어보세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를 헌사 받은 땅. 두말 할 것도 없이 비교불가의 정서와 품격을 지니기 마련입니다.
시인이자 사진가인 동시에 또 뛰어난 편집자이기도 했던 민병일 작가는 1993년, 박완서, 곽재구 작가 등과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에 왔다 그 풍경에 반에 기꺼이 ‘평사리에서’라는 시 한 수를 바쳤습니다.
앵두꽃 피는 봄날의 풍경이 오밀조밀 사랑스럽게 그려지고 있는 시 한편. 하동 문학여행의 1번지로 꼽히는 평사리는 이 ‘예쁜’ 시 한 수와 함께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를 지은 민병일 작가는 과거에 비해 현재 평사리의 모습이 너무 달라졌다며 그 옛 모습을 간직한 사진을 모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평사리를 추억함’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불과 16년 전이지만 1998년에 포착한 평사리의 소박하고도 소소한 일상, 덧대지 않는 담백한 풍경은 지금과는 살짝 다른 결을 보여주고 있지요.
1998년의 평사리와 2014년의 평사리, 흐른 시간만큼 당연히 풍경 역시 바뀌었겠지요. 그렇지만 하동 땅의 그 강한 기세까지 꺾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요. 평사리를 바라보는 여러분만의 시 한수로 2014년의 평사리를 기록해 두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는 문학여행중이니까요.
소설 ‘토지’의 여운,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맴돌다
‘평사리’가 유명세를 타게 된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핵심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이지요.
‘토지’는 동학혁명, 식민시대, 해방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치열했던 근현대사를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서 소설 ‘토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끝맺음을 하게 되지요
작품 구상 중 딸과 여행을 하다 섬진강을 낀 드넓은 악양평야와 마주하게 된 박경리 선생. 통영 출신인 그는 운명처럼 이곳 평사리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토지’는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1994년 8월까지 무려 25년의 산고를 거쳐 완결되었지요. 원고지 4만장에 3만 6천개의 단어가 모인 대서사시, 그 위에 평사리를 배경으로 한 민족의 지난한 삶이 담겨있는 것이지요.
현재 문화관광지로 조성된 ‘평사리 최참판댁’은 소설 속과 마찬가지로 한옥 14동이 겹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 영남지역의 전형적 양반가옥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니 그 배치를 더욱 눈여겨보면 좋겠지요. 더불어 조선 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은 토지세트장이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어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소설 ‘토지’ 속 이야기들을 더욱 세밀하게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문학배경으로서의 평사리를 만나고 싶다면 섬진강을 끼고 도는 넓은 들을 마주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최참판댁 사랑채 앞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악양들판, 박경리 선생에게 영감을 준 그 평야를 꼭 한번 여유 있게 내려다보시길 바랍니다.
평사리문학관, 지리산권 문학이 한자리에
최참판댁에서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소박한 ‘평사리문학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박경리 선생의 일대기와 여타 작품 등을 소개하고 있어 대한민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가의 모습을 좀더 가까이 살펴볼 수 있답니다. 또 ‘토지’의 주요 장면을 아기자기한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여 소설 속에 다시금 빠져들게 하지요.
지리산의 장언한 기운을 받았을까요? 평사리에서는 다양한 지리산권 문학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지리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하동은 ‘토지’뿐 아니라 일명 ‘지리산권 문학’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요. 김동리의 단편 ‘역마’,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등 하동의 정기과 통하는 지리산권 문학작품을 평사리문학관에서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한편, 매년 10월 둘째 주가 되면 최참판댁 일원과 평사리문학관이 들썩이기도 합니다. 2001년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토지문학제’가 열리기 때문이지요. 과거만을 추억하는 문학공간이 아니라 현재 활동하는 문인과 예비 문학도들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손꼽히는 문학축제라 할 수 있지요. 한때 문학도를 꿈꾸었던 당신이라면 지금부터 ‘토지백일장’이나 ‘토지 시낭송 대회’ 준비에 나서보는 건 어떨까요? 문학의 정취가 가득한 평사리에서라면 감성 충만, 필력 충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참판댁 일원(토지촬영장, 평사리문학관 포함)
주 소 :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498
입 장 료 : 성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하동이 낳은 작가, 이병주를 만나다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하동을 만나봤다면, 이제는 하동이 낳은 문인을 만나볼 차례입니다. 북천면 직전리에 나직하게 자리잡은 개성있는 2층 건물, 바로 ‘이병주문학관’입니다.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문인은 아니지요. 대부분이 낯선 이름일 텐데요. 이왕 문학여행을 떠나왔다면 이참에 새로운 문인, 새로운 작품과 인연을 맺는 것도 의미 있겠지요.
하동에서 출생한 나림 이병주 선생은 마흔넷의 나이로, 느지막이 작가의 길로 들어선 늦깎이 문인이었답니다. 하지만 그 이후 폭발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무려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며 한 달 평균 원고지 1천여 매에 이르는 폭풍 집필활동을 했다고 하네요. 특히 언론인 출신이었던 그는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역사의 진실을 파고드는 기개 넘치는 작품을 남겨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지리산’을 비롯, ‘낙엽’, ‘망명의 늪’ ‘그해 5월’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금 낯설 수 있지만 문학관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며 짧게나마 그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답니다.
전시실은 연대기 순서를 따라가며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대표작인 ‘지리산’의 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하여 하나의 장면을 만든 것)와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 그리고 영상 자료들이 함께 있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작가 이병주를 만날 수 있답니다.
* 이병주문학관
주 소 : 경남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231번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11월~2월은 오후 5시까지)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공휴일 또는 연휴에는 익일), 신정, 설날 및 추석 당일
만나고 또 헤어지는 역마의 길, 화개장터
‘화개장터’하면 가수 조영남이 부른 구수한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떠오릅니다. 물론 그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고 말이지요. 장터는 자고로 사방팔방에서 모여 들어야 판이 커지고 신이 나는 법, 화개장터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고, 농촌과 산촌, 강촌 사람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기에 더욱 신명이 나는 곳입니다.
화개장터를 제법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맛깔 나는 문장, 바로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한 구절입니다. ‘역마’는 이곳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요. 화개장터에서 주막을 꾸려 살아가고 있는 옥화에게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내 떠돌아야 하는 운명, 곧 역마살을 타고난 아들 성기가 있습니다. 마을별로 돌아가며 서는 장터라는 것이 본디 머무는 듯 떠나고, 떠나는 듯 머무는 공간이지요. 그래서 소설 ‘역마’ 속 화개장터는 머묾과 떠남을 고민하는 주인공의 처지와 더없이 어우러지는 공간이었지요.
이제 화개장터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5일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으로 바뀌면서 장돌뱅이의 향수, 떠돎의 정서는 옅어졌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나는 풍요로운 자연은 여전히 난장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일급수에서만 자란다는 섬진강 재첩국과 벚꽃이 필 무렵 바위에 꽃처럼 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벚굴은 화개장터가 아니면 먹어보기 어려운 명물이지요.
그 뿐인가요. 우리나라 심마니들의 최후의 보루인 지리산에서 나온 갖가지 약초 및 약재 그리고 그들로 담근 술도 화개장터의 터주대감 품목이랍니다. 먹거리뿐 아니라 화개장터에서는 아직까지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재래식 대장간을 만나볼 수 있지요. 또 매해 봄이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이 상춘객들의 마음을 설레게도 한답니다.
지리산과 섬진강변,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문학작품까지! 매력적인 문화여행~ 하동으로 떠나보세요 C-:
하동은 지리산을 등에 지고, 섬진강변을 따라 느릿느릿 걷기만 해도 좋은 여행지입니다. 하지만 그 땅의 기운이 스며든 문학작품을 되새기면서 돌아보면 풍경뿐 아니라 삶이 보이고, 더 나아가 민족이 보이는 매력적인 여행지랍니다. 책 한권과 함께하는 여행, 이제 정말 떠나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