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팬데믹, 원유 시장 판도를 바꾸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원인 석유 소비는 급락했고 유가는 바닥을 치고 있다.
지나 놓고 보니 OPEC+ 카르텔의 횡포, 세계 경기 침체,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같은 원유 시장 변수는 변수도 아니었다.
인간의 예측 밖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원유 시장 판도를 바꿔놓고 있다.
세계 원유 시장 패권을 노리던 미국 셰일업체들은 파산에 내몰리고 있고 생산량을 조절하며 유가를 좌우하던 OPEC+는 각자도생하며 분열하고 있다.
WTI 선물 가격은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대로 추락했고 올해 평균 유가는 지난해 대비 반 토막 수준인 20불대로 전망되고 있다.
코로나 19가 가져온 변화 그리고 그 불확실성을 진단해본다.
같은 원유, 145불과 마이너스 37불
2008년 7월 3일에 거래된 미국 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145.29불을 찍었다.
우리나라 도입 원유 가격 지표가 되는 중동 두바이유의 같은 달 4일 현물 가격은 1배럴에 140.70불에 거래됐는데 아직까지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12년이 흐른 2020년 4월의 어느 날, WTI 선물 가격은 마이너스대로 추락했다.
지난 4월 20일 미국 뉴욕 상품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5월물 WTI 선물 가격이 1배럴에 마이너스(-) 37.63불에 거래됐다.
원유 1배럴당 웃돈 37불을 주고 팔겠다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경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최근의 원달러 환율을 적용하면 2008년 어느 날 서부텍사스원유 1리터를 팔면 약 1081원 정도를 받았는데 2020년 4월의 어느 날에는 오히려 290원을 얹어주고 원유를 가져가라고 사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유 저장 시설이 부족한 상태에서 선물 만기일이 다가오면서 발생한 지극히 이례적인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로도 국제유가는 바닥을 맴돌고 있다.
최근 들어 국제유가가 소폭의 반등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지난 4월 22일 두바이유 거래 가격은 1배럴에 13.52불에 머물렀다.
똑같은 원유인데 2008년 최고가를 찍던 시점보다 90.4%가 하락했다.
원유는 전 세계에서 하루 1억 배럴 소비되는 제1 에너지원이다.
석유가 부족하면 비행기나 선박, 자동차는 달릴 수 없고 발전소는 멈춰서며 공장 가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원유는 자급자족할 수도 없다.
신은 제한된 일부 산유국에게만 원유라는 선물을 내렸고 우리나라 같은 자원 빈국은 원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유국들은 세계 원유 수급을 통제하기 위해 카르텔까지 조직하며 유가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원유 가치는 하늘 그리고 땅의 간극만큼 널뛰기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땅 밑까지 뚫고 들어갔다.
코로나 19로 소비 급감, 원유 담아 둘 곳이 없다
세계 원유 가격을 결정하는 3대 유종은 미국 뉴욕 상품거래소의 WTI, 영국 런던거래소의 브렌트, 중동 두바이유가 꼽힌다.
이중 두바이유가 유일하게 현물로 거래된다.
두바이유는 원유 수요와 공급 환경이 수렴된 가격으로 실물이 거래되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WTI와 브렌트유는 선물로 거래되고 있다.
선물은 미래 특정 시점의 가격을 예측해 거래되는 금융 기법인데 뉴스 등에서 언급되는 WTI 몇 월 물 등의 표현은 선물 거래가 만기 돼 현물로 인도되는 시점을 말한다.
지난 4월 20일 거래된 WTI 5월 만기 선물 가격이 사상 유례없는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한데는 원유 선물 거래의 함정, 코로나 19가 야기한 세계 석유 소비 감소, 미국 WTI 선물 거래 중심인 쿠싱 지역의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매우 이례적인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하루 1억 배럴 소비되는 원유는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7천만 배럴까지 추락하면서 심각한 공급 과잉 현상을 겪고 있다.
그 와중에 사우디와 러시아는 오히려 증산 경쟁을 벌이면서 원유는 차고 넘치며 담아 둘 저장탱크가 부족한 상황까지 내몰렸다.
WTI 선물 거래 중심지인 미국 오클라호마의 쿠싱(Cushing) 지역 역시 원유 저장 용량이 턱 밑 까지 차오르고 있다.
텍사스처럼 원유 생산 거점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규모 석유 소비가 이뤄지지도 않는 쿠싱이 WTI 선물 거래 중심지가 된 데는 대규모 상업용 원유 저장시설이 밀집해있고 원유 파이프라인 교차 지점으로 선물 만기가 된 WTI를 현물로 인도받는 집산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5월 선물 만기일이 다가오면서 현물 원유를 인도받아야 할 투자자들은 쿠싱 일대의 원유 저장시설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손해를 보면서 원유를 넘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결국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하게 됐다.
이후 WTI 선물 가격은 플러스로 회복했지만 여러 복합적 요인이 겹치면서 돈을 주고 산 원유를 돈을 주고 팔아야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기록에 남게 됐다.
OPEC 카르텔이 수급·가격 통제해왔지만…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에서 수렴되는 것이 시장 원리이다.
그런데 원유는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이 공급량을 조절하며 시장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
카르텔 기구인 OPEC이 불공정거래를 주도하고 있는 것인데 그 막강한 영향력은 시장에서 확인되고 있다.
2008년 만큼은 아니더라도 2011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불을 넘어 서며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세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끌던 중국과 인도 같은 신흥 개발도상국가를 중심으로 석유 수요가 증가한 영향이 컸는데 세계 석유 수출을 주도하는 OPEC은 증산에 나서지 않았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석유 소비국 시름이 깊어지고 있던 당시 OPEC은 정기총회에서 생산량 동결에 합의했다.
생산량 동결 조치의 배경으로 OPEC은 ‘고유가 상황은 석유 수급 등의 펀더멘탈 불안 때문이 아니라 달러화 가치 급락 여파로 투기자금이 인플레이션 위험 헤지(Hedge)를 위해 석유 시장에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OPEC의 당시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화 약세로 원유를 팔아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산유국의 실질 구매력이 감소하면서 고유가 정책을 유지했고 투기 자금이 금융 시장에서 원유 선물 시장으로 급속히 이동하면서 국제유가를 더 급격하게 끌어 올린 효과가 컸다.
그렇더라도 ‘국제유가는 결국 원유 수급이 결정한다’는 시장 기본 원리가 고유가의 배경이었고 OPEC이 그 중심에서 생산량을 통제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OPEC+ 대표 주자들은 분열하고!
과거 보다 현재의 산유국 카르텔은 더욱 확장됐고 견고해진 상태이다.
중동 중심의 OPEC에 더해 러시아 중심의 비OPEC 산유국까지 가세한 이른바 OPEC+(플러스)가 세계 원유 공급 물량을 결정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원유 수출이 주력 산업인 산유국들이 힘을 결집했다는 점에서 OPEC+는 할리우드 마블사의 히어로 집단인 어벤져스에 견줄 만 하다.
그렇다고 OPEC+가 세계 원유 시장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산유국 그들만의 리그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할 나름의 어벤져스를 구성하며 힘을 결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OPEC+가 등장한 배경은 유가 부양의 절박함 때문이었고 그 힘은 시장에서 확인된다.
한때 배럴당 100불대가 넘던 국제유가는 석유 소비 정체 속 원유 공급 과잉 영향으로 추락을 거듭하면서 2016년 1월에는 20불대까지 떨어졌다.
유가 부양이 절실했던 OPEC은 같은 해 11월 열린 총회에서 전격적으로 생산량 감축에 합의하며 회원국 전체에서 하루 120만 배럴의 원유 생산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도 최대 60만 B/D까지 생산량을 줄이겠다고 결정하면서 유가 반등을 위한 감산에 동참했다.
OPEC과 비OPEC 산유국이 힘을 모은 어벤져스 카르텔 ‘OPEC+’가 탄생되는 순간인데 이후 OPEC+는 감산 기한과 규모를 늘려가며 수급을 통제해왔고 국제유가는 1배럴에 50~70불 사이를 오가는 안정적인 모양새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OPEC+ 특히 OPEC 맹주인 사우디와 비OPEC을 대표하는 러시아 사이의 갈등과 자존심 대결이 국제유가를 바닥까지 끌어 내리고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석유 소비가 급감하면서 유가가 폭락하자 지난 3월 OPEC 맹주인 사우디 주도로 추가 감산을 논의했는데 비OPEC 산유국을 대표하는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못마땅한 사우디는 4월 이후 자국의 최대 능력치까지 원유 생산량을 끌어 올렸고 원유 공급 가격은 대폭 인하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는데 러시아 역시 맞대응하며 증산에 나서면서 OPEC+ 동맹은 균열되고 있다.
어벤져스 군단의 축인 아이언 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분열하며 서로 분쟁하는 ‘시빌 워(Civil War, 내전)’는 현실 세계 속 OPEC+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세계 원유 시장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다행히도 OPEC+는 5월 이후 두 달 동안 하루 970만 배럴 규모의 감산에 합의하며 내전이 소강상태에 돌입한 모습인데 세계 원유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OPEC+ 감산 합의가 유가 부양보다는 추가적인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 원유 증산 전망, 빨간 불
전통적으로 세계 원유 수급과 가격은 OPEC 생산량 조절,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세계 석유 수요 등의 영향을 받아 왔다.
미국 중심의 셰일 원유 개발 확대, 미∙중 간 무역 분쟁에 따른 세계 경기 위축, 탈 화석연료 움직임에 기인한 석유 소비 정체 같은 이슈들은 최근 수년 사이에 새롭게 등장하는 변수들이다.
그런데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데다 가혹하고 공포스러운 전혀 새로운 변수를 맞닥뜨리고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은 세계를 연결하는 교통길을 차단시켰고 공장을 멈춰 서게 했으며 물류 이동을 제한하는 재앙을 불러왔다.
세계 석유의 절반 이상이 도로 운송 부문에서 소비되는데 코로나 19로 이동 제한이 확대되면서 4월 석유 수요는 30% 가까이 줄어들었고 이 상황이 언제쯤 완벽하게 종식될지 짐작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주요 경제학자들은 앞으로의 세계 경제가 코로나 19 사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으로 전망할 만큼 충격파는 엄청나다.
원유 시장 역시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면서 세계는 작동을 멈췄고 석유 소비는 급감했으며 국제유가가 바닥을 쳤다.
그 여파로 원유 패권의 한 축으로 부상한 미국 셰일 기업들은 줄 도산을 맞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인 IEA가 발간한 연간 보고서 ‘World Energy Outlook 2019’에 따르면 미국 석유 생산량은 2030년에 하루 2,130만 배럴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1,200만 배럴을 넘으면서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약 10년 이후에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19 여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20불을 유지할 경우 미국 셰일 원유 생산 업체의 80%가 파산할 것으로 분석되면서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미국에너지정보청인 EIA가 내놓은 가장 최근 전망에 따르면 올해 WTI 평균 가격은 배럴당 29.34불에 그친다.
지난해 평균인 57.02불의 절반 수준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이니 미국 셰일 업계는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에 내몰릴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30년대 세계 원유 생산 증가분의 85%가 미국산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코로나 19 사태로 셰일 업계가 줄줄이 파산한다면 미래 세계 석유 수급 전망은 다시 그려야 할 상황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망가진 수급 불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OPEC+ 어벤져스가 극적인 감산에 합의하더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산유국들은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원유 수출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 코로나 19로 줄어든 석유 수요 만큼 생산량을 줄여 가며 유가를 부양할 인내심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나쳐 놓고 보니 OPEC+ 카르텔이나 셰일원유 개발 확대,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같은 변수들은 그저 인간 세계 이슈였을 뿐이다.
인간 통제 밖에 있는 코로나 19가 언제쯤 완벽하게 종식될지, 석유 수요는 얼마나 회복 가능하고 유가가 안정적인 수준으로 반등할 수 있을지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원유 시장의 불확실성은 그만큼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