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을 끝낸 고분자재료의 힘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이 우수한 무기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는 미-이라크 전, 또 그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닌데요. 누구나 2차세계대전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 때문에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일부분만 옳은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끝낸 또 다른 공신으로 3가지 종류의 고분자재료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들 3가지 고분자는 과연 어떤 재료였으며 어떤 기능으로 정전을 도왔을까요?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 Low Density Polyethlene)
그 첫 번째는 영국의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 PLC)사가 1939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 Low Density Polyehtylene)입니다. 당시 독일은 막강한 폭격력을 지닌 비행기를 개발해서 영국을 폭격하고 있었고, 런던의 주민들은 잦은 공습으로 공포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반시민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갑자기 연출됩니다. 바로 독일 폭격기가 영국 상공에 도착하기전에 영국군의 대포나 폭격기가 독일 폭격기를 명중 타격하여 추락시키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당시 영국은 군용 레이더(radar)를 개발 중에 있었으나, 레이더 케이블 피복재료에 적합한 절연체를 찾지 못해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ICI가 개발한 LDPE 필름이 고주파 라디오파에 잘 견디는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결과 영국군 레이더가 독일 폭격기를 사전에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ICI사의 LDPE 발명은 우연의 결과였습니다. LDPE의 원료인 에틸렌 기체가 고온고압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연구하던 중에 불순물인 산소가 실수로 고압용기에 유입돼 기체인 에틸렌이 고체인 폴리에틸렌으로 변하는 중합반응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현상을 놓치지 않고 ICI의 Michael Perrin(1905-1988)은 1935년에 이 현상을 역으로 이용해서 고압에서 LDPE를 제조하는 공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우연한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어마어마한 발명의 계기로 만든 유명한 일화입니다. 현재에도 고분자 재료 중 LDPE가 가장 소비량이 많습니다.
스티렌 – 부타디엔 고무(SBR, styrene-butadiene rubber)
두 번째는 합성고무입니다. 왜 합성고무가 전쟁에서 중요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군용자동차의 타이어 제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천연고무의 중심 생산지인 동남아 일대를 1942년에 점령하는 바람에 타이어 제조에 필요한 천연고무의 공급이 끊어졌는데요. 구소련과 독일에서는 합성고무가 생산되고 있었지만 미국은 한참 뒤처져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정부가 합성고무 생산연구에 돌입한 결과, 1944년에는 미국 내에 스티렌-부타디엔 고무(SBR, styrene-butadiene rubber) 공장이 50여개에 달했고 당시 생산량이 천연고무 생산량의 두 배를 넘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연합군이 독일의 여러 합성고무 공장을 폭격해 파괴시키며, 미국정부가 개발에 앞장섰다해서 GR-S(government rubber styrene)라 불리기도 했던 합성고무가 독일과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 가는데 톡톡히 역할을 해낸 셈입니다.
폴리테트라 플루오로에틸렌 (Polytetrafluoroethylene, PTFE)
마지막으로 테플론(Teflon)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테플론은 미국 듀폰(DuPont)사의 상표명이며 화학명은 폴리테트라 플루오로에틸렌(Polytetrafluoroethylene, PTFE)으로, 폴리에틸렌의 수소를 모두 불소(fluorine)로 바꾸어 놓은 화학구조를 지닙니다. 프라이팬에 음식물이 들러붙지 않게 코팅하는 테플론 플라스틱이 전쟁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의아할 것인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계획(Manhattan Project)를 통해 많은 과학자들을 동원해 원자탄 개발을 서두르고 있었던 미국은 원자탄 제조에 필수적인 6불화 우라늄(UF6) 가스를 분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스는 어찌나 녹을 잘 슬게 하는지 웬만한 금속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이 가스에 견디는 새로운 재료를 찾아내는 것이 당면과제였고, 그러던 중 미국군부는 듀폰사에서 강산, 강염기, 유기 용매에 잘 견딜 뿐아니라 고온에서도 녹거나 타지 않으며, 몹시 미끄러워 이물질이 들러붙지도 않는 새로운 플라스틱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미국군부는 곧 듀폰사를 접촉했으며 듀폰사는 비밀리에 테플론 플라스틱을 제조해 미국정부에 제공했습니다. 미국정부는 물론 이 테플론을 이용해 원자탄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테플론이 발명되기까지의 과정은 더욱 흥미로운데요. 이야기는 1938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사학위를 받은지 2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Roy Plunkett(1910~1994)는 듀폰사에서 새로운 무독성 냉동제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TFE)이라는 기체를 출발물질로 사용하려고 이 기체가 담긴 고압탱크의 밸브를 열었으나 기체가 조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Plunkett가 고압탱크의 무게를 달아보니 믿기 어렵게도 기체가 가득 들어 있는 무게였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예 탱크를 톱으로 잘라 속을 보니 놀랍게도 미끈거리는 흰 가루들이 있었습니다. 이 흰가루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분석해보니 화학조성이 TFE와 같을 뿐 아니라 TFE로부터 생긴 고분자인 테플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실수로 탱크에 공기가 조금 섞여 들어가 TFE를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빈 탱크 사건은 곧바로 듀폰사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TFE로부터 테플론의 합성법을 찾아낼 수 있게 했고, 결국 일본을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연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온다는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의 명언을 생각나게 하는 과학사 중의 중요한 일화입니다. 우연한 현상을 간과하지 않는 끈질김과 강한 호기심의 소유자만이 발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