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으로 떠나는 ‘마무리 여행’ – 아름다운 경남 고성 수목원 여행지 3선
서울에서 통영으로 혹은 거제로 놀러왔던 친구들이 간혹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혹시 올라가는 길에 잠깐 들를 데가 있느냐고. 이제 먼 길을 가야 함에도 굳이 또 다른 여행지를 찾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 남쪽에서의 여행이 정말 좋았기에 여운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욕심, 혹은 이곳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서라도 보상 심리(?).
마침 내가 살고 있는 통영의 윗동네 고성에는 그런 두 가지 마음을 모두 만족시킬 곳이 있다. 그것도 세 곳이나. ‘마무리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소개하는 곳은 갈모봉 산림욕장, 만화방초 수목원, 소담수목원. 모두 숲이다. 다만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갈모봉 산림욕장
갈모봉 산림욕장은 고성군에서 관리하고 있는 곳으로,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많다. 원래부터 그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것은 아니란다. 1970년대부터 조림을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편백나무숲이라면 통영이나 남해에도 존재하기에 일부러 고성까지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올 때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럴 때면 더더욱 그곳을 추천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숲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그래서 낯선 장소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림욕장에 들어서면 갈모봉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정작 내가 추천하는 곳은 팻말이 가리키지 않는 내리막길이다. 처음엔 울퉁불퉁 작은 바위들이 드러나 있는 길을 지나야 하지만, 고작 3, 4분 남짓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짧은 구간만 지나면 주위가 온통 나무와 풀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길을 걷게 되는데, 이곳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길에 접어들어 걸으면 걸을수록 사람의 소리에서 멀어지고 온통 고요함 속에 혹은 자연의 소리 속에 파묻히게 될 뿐이다.
마치 토토로 혹은 작은 요정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이 길의 초입부터 다양한 휴식공간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다. 오염물질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톤치드로만 가득 찬 공기를 천천히 여유롭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선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수목원 만화방초
대전통영고속도로의 동고성 요금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목원 만화방초는 이름부터가 독특하다. 만화방초(萬花芳草). 만 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이 있는 곳. 개인이 운영하는 수목원이다.
고성에서 태어난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으로 다시 돌아온 정종조 원장은 20여 년 동안 이곳을 가꿔왔다. 아니 가꿨다는 표현보다는 좀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인위적으로 길을 내고 꽃을 심거나 나무를 식재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원래 있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곳이니까.
그래서 만화방초의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일부러 닦아놓은 길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밀짚모자를 쓰고 나타난 주인아저씨는 “동물들이 다니던 길을 사람이 다니니까 자연스럽게 넓어진 것”이라 설명을 해준다. 그래서 가끔은 몸을 잔뜩 숙이고 지나야 하는 길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도 자연이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그대로 두어야 한단다.
나는 그런 만화방초를 이제 막 출산을 보름 정도 앞두고 있던 아내와 함께 찾은 적이 있다. 평소에도 산을 잘 탔기에 그리 편하지 않은 길을 잘 돌아다니던 아내는, 이곳의 분위기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도 인위적인 무언가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기뻤다고 했다.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아이가(지금은 첫 돌을 지내고 한창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다) 부디 이곳의 모습처럼 싱그럽고 자연스럽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도 했다. 물론 모두 이곳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순조롭게 태어난 아기는 만화방초의 풀과 꽃만큼이나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니 이곳을 걸을 때면 좀 더 사려 깊은 발걸음이 필요하다. 무엇 하나 의미 없이 피어난 생명이 없고 무엇 하나 가치 없이 자라고 있는 생명은 없으니 될 수 있는 한 발밑을 조심하며 다녀야 한다. 친구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처음엔 귀찮아하는 표정이만 막상 만화방초에 들렀다 집에 돌아간 경우에는 십중팔구 내게 전화가 온다. 정말 좋은 곳에 다녀왔다면서. 그리고 덕분에 잠시나마 겸손해질 수 있었다면서.
소담 수목원
고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소담수목원은 앞의 두 곳에 비하면 사람의 손길이 더 많이 간 곳이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그리고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들도 꽤나 많은데, 모두 이곳을 혼자 관리하고 있는 성만기 원장의 이력에서 그 독특함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항공사에서 27년 동안 근무하며 만난 다양한 수종을 직접 들여와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들, 꽃들이 어지럽게 분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 딱 거기에 있어 좋은 모습들만 볼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이곳저곳에 산수국이 한창 피어 있어 질경이가 잔뜩 자라고 있는 푹신한 길을 걷는 재미가 한층 배가 된다.
소담수목원 역시 만화방초 수목원처럼 꽤나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데,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이상을 할애해야 한다. 물론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 무엇보다 가장 윗부분까지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계수나무들의 그 짙은 푸름을 보기 위해서는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다.
그렇다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어디를 돌아보든 부드럽게 사람을 잡아끄는 초록색 덕분에 걷는 내내 오히려 온몸이 가벼워진다. 다시 먼 길을 운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좋은 일도 없다. 소담수목원 뿐 아니라 앞서 소개한 갈모봉 삼림욕장과 만화방초 수목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어떤 곳이 이처럼 훌륭한 마무리 여행을 선사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여행 기간 동안 간절히 원하던 진정한 휴식은 바로 그곳에서 완성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내 친구들에게 꼭 한 번 이 세 곳 중 한 곳을 들러보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Special Guest
글/사진 정환정 작가
잡지기자, 여행 카운슬러, 기업홍보, 취재 프리랜서를 거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아기를 키우고 있는 평범한 남자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 생길 때 가장 기분이 좋아지는 원초적인 남자
아직 완성하지 못한 세계일주를 가끔 꿈꾸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