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서체’ 캠페인을 통해 보는 GS와 독립운동

회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과거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GS 기업 정신에 기반하여,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나마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하는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바로 나라를 위해 몸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 기념 ‘독립서체’ 캠페인입니다.

‘독립서체’ 캠페인은 파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일부 독립운동가분들의 글씨체를 모아 연구하여, 전문 폰트 개발업체와 협업, 당시의 글씨체를 현대에 맞게 복원·제작하는 것인데요. 이를 회사 채널을 통해 무료 배포하여 그 의미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우선 3월에는 일제강점기 때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선언을 이끈 한용운 독립운동가와 일왕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 주요인물을 처단해 대한독립운동에 중요한 방점을 찍은 윤봉길 독립운동가의 글씨체를 공개합니다.

사실 GS그룹은 과거 독립운동 지원 기업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요. 과연 GS와 독립운동에는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까요?

 

GS와 독립운동

gs칼텍스, gs칼텍스사보, 허만정, gs창업주, 독립서체캠페인
‘독립서체 윤봉길’ 폰트 사용

“우리는 이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이 민족의 자유를 향유하기에 있는 힘을 다해야 하겠는데 먼저 이 나라에서 무지를 추방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교육이라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우리 진주에는 아직 고등보통학교 하나도 없는 실정이어서 유감입니다.”

 

허만정 GS창업주(이하 허만정)가 진주여고를 설립한 것은 1925년 4월 25일이다. 이미 1919년경에 진주에는 <일신여자 보통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교육의 힘에 눈을 뜬 허만정은 더 많은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허만정이 학교를 세우게 된 계기는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을 겪으면서이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첩경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한 허만정은 어느 날 그의 부친인 허준을 찾아간다.

“이번에 상경했을 때 서울에서 3·1 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곧이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동포들이 다치거나 학살되었고 더러는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이 동양평화를 가장하고 한국을 병합해서 야욕을 채우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 자신도 자기의 권리를 보존하지 못하고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국토를 수호하지 못하며 자유를 상실함은 천추의 치욕이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고서는 지하에 가도 조상의 넋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이 민족의 자유를 향유하기에 있는 힘을 다해야 하겠는데 먼저 이 나라에서 무지를 추방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교육이라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우리 진주에는 아직 고등보통학교 하나도 없는 실정이어서 유감입니다. 제가 비록 미거하오나 학교설립에 힘써보려고 하는데 아버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라고 물었다.

그 말에 아버지 허준은 극명하게 대답한다.

“네 말이 옳다. 우리는 독립해야 하며 항상 이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학교설립이 필요하다. 우리 집안의 재력이 허락만 한다면 단독으로라도 설립하겠지만 그리 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네 소유 토지 중 함안에 있는 것 약 700석지기를 제공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상의해서 실현되도록 힘써 보라.”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은 허만정은 그 후 진주에 가서 학교 설립에 착수하게 된다. 본래 그는 일제하의 조선총독부에 일신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이 교육받아 일제에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는 학교 설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할 특별한 명분이 없었으므로 일단 학교 설립을 허가한다. 이 때부터 허만정은 고등교육기관인 일신고보 설립에 앞장서게 된다.

 

gs칼텍스, gs칼텍스사보, 허만정, gs창업주, 독립서체캠페인
‘독립서체 윤봉길’ 폰트 사용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도쿄를 방문, 도쿄 유학생회에 자금을 기탁하였고 백산상회 발기인으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공급하는 데 일익을 하였다.

허만정은 일제하에서 백산상회를 통해 직,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보태는 데 기여하였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로부터 광복되자 그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국민 대회의 준비에 동참했던 일이다. 1945년 9월 7일 오세창, 김성수, 윤일선, 서상일, 백관수, 조만식, 장택상,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열린 국민대회가 그것이다.

당시 국민대회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정 수습 방법, 정당 설립, 국가의 정당 및 정책 등에 대한 범국민적인 토론을 하기 위한 대회였다. 당시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500명의 국민 대회> 준비위원회의 발기 인사 속에 허만정도 포함되어 있다. 허만정은 해방된 조국에서 새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살아생전에 허만정은 진주여고 설립과 백산상회 주주참여 등으로 민족의 자립과 독립에 힘썼다.

 

 

gs칼텍스, gs칼텍스사보, 허만정, gs창업주, 독립서체캠페인
‘독립서체 윤봉길’ 폰트 사용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곡물, 면직물, 해산물을 판매하는 상회였다. 자본금 13만원으로 설립된 이 상회는 주식회사 형태로서 이루어졌는데 그 주주들은 영남지방의 대지주들이었다.

회사 설립에는 백산 안희제를 비롯하여 이유석, 추한식, 최준 등이 참여하였다.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 보면 쌀과 옷감, 생선 등을 취급 판매하는 점포였지만 그 실상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대던 자금조달 본부였다. 당시 백산상회에는 허만정을 포함한 총 32명의 주주가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백산상회가 평범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산상회의 영업을 명분으로 국내의 대구, 서울, 원산에 연락소를 두는 한편 만주의 안동(오늘날의 단동), 봉천(오늘날의 심양) 등지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여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가게의 이익뿐만 아니라 원금까지도 독립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백산상회의 경영은 언제나 적자였다.

백산상회에서 거두어진 돈은 남형우와 윤현진을 통해 상해로 보내졌다. 윤현진은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이었다. 백산상회에서 보내진 돈이 상해임시정부의 거의 대부분의 경비를 조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7년 조선 총독부는 백산상회가 상해임시정부의 자금 공급처라는 것을 알아채고 지체 없이 압수에 들어간다. 회사의 장부를 조사하고 임직원을 고문한 끝에 결국 백산상회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을 닫고 만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노력했던 허만정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그 뒤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다.


GS창업주의 노력부터 이어져왔던 애국의 마음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3월부터 시작되는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독립서체’ 캠페인. 이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대한독립을 위해 힘쓰셨던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이 작게나마 되새겨질 수 있길 기원해봅니다.

 


I am your Ener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