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산책] 우리가 겪는 가장 원초적인 시각의 경험,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기슭으로 난 길’

세계 유명 미술관과 명화를 소개하는 2019 GS칼텍스 캘린더 9월 이야기입니다.

인류 문화예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세계 굴지의 초대형 컬렉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은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인류 문화예술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세계 굴지의 초대형 컬렉션입니다. 소장한 유물이 무려 270만여 점으로, 구석기 시대의 유물부터 20세기의 문화재까지 각종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럽 회화와 스키타이 유물, 고대 공예품, 동양 문화재 컬렉션 등이 유명합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경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경

에르미타주가 소장한 유럽 회화들 가운데는 손꼽히는 미술사적 걸작들이 많습니다. 그 중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것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렘브란트, 드가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그 중 감각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인 ⌈생트 빅투아르 산기슭으로 난 길⌋이 있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시각의 경험을 그리다

생트 빅투아르 산 기슭으로 난 길, 1898-1902년, Oil on canvas, 78×99cm
생트 빅투아르 산 기슭으로 난 길, 1898-1902년, Oil on canvas, 78×99cm

해발 1,000m의 생트 빅투아르 산은 세잔의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에서 북동쪽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프로방스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가장 험준한 산으로 꼽힙니다. 석회암질로 되어 있어 맑은 날에는 광채가 느껴지고, 둔중한 덩어리감과 웅장한 봉우리로 일대 주변을 압도하는 것이 장관입니다. 세잔은 이 산을 소재로 유화를 44점, 수채화를 43점이나 그렸습니다.

그림을 보면 전경에 황톳길이 보이고 주변으로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생트 빅투아르 산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습니다. 봉우리가 회색인 것으로 보아 단단한 바위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구성의 이 그림은, 그러나 툭툭 치듯 그린 붓 자국으로 화면 전체가 다소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산봉우리, 숲, 나무, 길 등 모든 것이 깔끔하고 명료하지 않고, 자꾸 치댄 붓 터치로 인해 대략적인 면과 덩어리는 보이나 디테일이 전혀 살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게 그저 색채의 덩어리로 다가옵니다.

이 그림에서 세잔은 자연의 외양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일반적인 서양의 풍경화들과 비교하면, 이 그림은 거칠고 둔탁할 뿐 아니라 심지어 미완성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잔이 그리고자 한 것은 바로 ‘우리가 겪는 가장 원초적인 시각의 경험’입니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 시각의 경험은 유동적인 것이고, 불연속적인 것이며, 복합적인 것입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의 모습
생트 빅투아르 산의 모습

추상회화 탄생의 초석이 되다

흥미로운 것은, 세잔이 이런 시각의 경험에 집착하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림은 점차 단순화되었고, 형태와 색채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변화를 토대로 후대의 화가들은 보다 단순한 형태와 구성, 또 형태의 속박으로부터 분리된 자유로운 색채를 추구했고, 그림이 점점 추상화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몬드리안의 추상회화가 그렇게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세잔이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 이유입니다.

폴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피카소


보는 순간 생생하게 다가오는 감각적 경험인 날것의 실체를 그리다

화가로서 세잔이 특이했던 점은, 과학자처럼 감각을 통한 지각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 했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게 무엇일까?’,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걸까?’ 등의 질문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세잔은 우리의 눈이 처음 보는 것은 산이나 들, 나무, 꽃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개개의 사물을 인지하기 이전에 우리 눈은 세계를 이러저러한 색채의 면들이 어우러진 일종의 ‘모자이크’로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붉은색의 조각, 노란색의 조각, 푸른색의 조각 같은 것이 우리 눈에 먼저 들어오고, 뒤이어 그 색 조각들의 조합을 나무나 꽃, 강아지 등 기존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물의 형태로 인식하는 과정이 뒤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한 눈이 아니라 각도 차이가 있는 두 눈으로 사물을 봅니다. 뇌는 이 두 이미지를 조합해 사물을 입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리고 붙박이로 초점을 한군데만 맞추고 보는 게 아니라 부단히 초점을 이동하면서, 게다가 몸도 움직이면서 사물을 봅니다. 그러므로 세잔에게 있어서 ‘보이는 실체’와 ‘인식되는 대상’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란 우리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정리된 것이 아니라, 보는 순간 생생하게 다가오는 감각적 경험인 ‘날것으로서의 실체’를 그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세잔이 그린 또다른 작품 (생트 빅투아르산, 1902-1904년, Oil on canvas, 70x89.5cm)
세잔이 그린 또다른 작품 (생트 빅투아르산, 1902-1904년, Oil on canvas, 70×89.5cm)

시각 경험이란 이처럼 유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복합적인 것입니다. 이때의 순수한 경험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화가는 시각예술인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에 세뇌된 인식만 그리는 한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잔은 이렇듯 시각이라는 감각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진정으로 ‘시각예술’ 다운 미술작품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이주헌
이주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 전공. ‘한겨레’ 문화부 미술 담당 기자, 학고재 갤러리와 서울미술관 관장 역임.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이야기꾼으로 활동, 미술로 삶과 세상을 보고, 독자들이 좀더 쉽고 폭넓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꾸준한 집필과 강연 진행. EBS에서 ‘이주헌의 미술 기행’, ‘청소년 미술 감상’ 등 프로그램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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