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산책] 마네와 모네의 끈끈한 동지애와 우정을 보여주다, 에두아르 마네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세계 유명 미술관과 명화를 소개하는 2019 GS칼텍스 캘린더 8월 이야기입니다.

뮌헨이 자랑하는 회화미술관, 노이에 피나코테크

노이에 피나코테크(Munchen Neue Pinakothek)는 독일의 뮌헨이 자랑하는 세 개의 피나코테크 가운데 하나입니다. 피나코테크는 그림만을 수집해 보여주는 회화미술관을 지칭하는데, 알테 피나코테크•노이에 피나코테크•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가 뮌헨이 자랑하는 그 세 개의 미술관입니다. 세 미술관은 시대별로 나누어 미술작품을 수장하고 있습니다.

  • 알테 피나코테크(1836년 설립) : 13~18세기 유럽 회화
  • 노이에 피나코테크(1853년 설립) : 19세기 유럽 회화
  •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2002년 설립) : 20~21세기 현대미술

세 피나코테크는 모두 뮌헨 중심부의 ‘미술구역’인 쿤스트아레알에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 세 미술관뿐 아니라 조각미술관인 글립토테크, 현대미술관인 브란트호르스트 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이 밀집해 있습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전경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전경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소장품 수는 5천여 점입니다. 이 가운데 1/10 가량인 550여 점이 전시실에 내걸려 관람객을 맞고 있습니다. 설립자인 바바리아 왕 루트비히 1세는 특히 독일 근대미술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레 이 분야의 질 좋은 작품들을 다량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밖에 프랑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상징주의 걸작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습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가 자랑하는 독일 근대회화로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눈에 덮인 전나무 숲⌋, 요한 프리드리히 오버벡의 ⌈이탈리아와 독일⌋, 카르르 스피츠베크의 ⌈가난한 시인⌋, 안젤름 포이어바흐의⌈메데이아⌋ 등이 있습니다. 프랑스 걸작으로는 밀레의 ⌈접목하는 농부⌋, 도미에의 ⌈돈키호테⌋,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 고갱의 ⌈신의 아이⌋ 등이 유명합니다. 모두 미술사 책이나 미술 교양서에서 흔히 보는 명작들입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이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자랑하는 작품 중에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가 있습니다.


인상파를 대표하는 두 거장, 마네와 모네의 우정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4년, Oil on canvas, 83×105cm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4년, Oil on canvas, 83×105cm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는 인상파를 대표하는 두 거장입니다. 두 사람은 성이 비슷해서 성만 부르면 혼동하기 쉽습니다. 둘 다 인상파 화가다 보니, 이들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느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당대에도, 특히 후배인 모네가 막 화단에 나섰을 무렵, 일부 파리의 미술인들조차 이들을 잘 구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당시 진취적인 미술을 추구하며 보수적인 비평가들과 맞서 싸우던 동지로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 우정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이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입니다.

모네가 배 아틀리에를 마련한 것은 1873년의 일입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과 대기의 표정을 묘사하기 위해 야외로 나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모네는 야외 제작을 가장 선호했던 화가로 꼽힙니다. 모네는 폭풍이 이는 바다를 그리기 위해 절벽에 끈으로 이젤을 묶고 돌을 괴어 사투를 벌이다시피 하며 붓을 놀렸던 화가입니다. 강 주변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배를 아틀리에로 꾸며 물에 띄운 것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모네다운 행동이었습니다.

마네의 그림 속에서 모네는 지금 살랑살랑 흔들리는 배에 앉아 한가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네 특유의 굵고 활기찬 붓질이 그림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모네는 작업에 집중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입니다. 모네의 이젤 위에는 강변의 풍경을 담은 캔버스가 놓여 있습니다. 모네와 이젤 사이에서 앞쪽을 바라보는 여인은 바로 모네의 아내 카미유입니다. 배는 작지만 편안해 보이고 저 뒤로 펼쳐지는 하늘과 강둑은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모든 게 넉넉하고 평화롭게 다가옵니다.

마네가 그린 또다른 모네의 가족 모습 (아르장퇴유 정원에서의 모네 가족, 1874년, Oil on canvas)
마네가 그린 또다른 모네의 가족 모습 (아르장퇴유 정원에서의 모네 가족, 1874년, Oil on canvas)

인상파의 대부로 통하는 혁신적이 예술가가 되다

이렇게 여유로운 그림 속 모습과 달리 당시 모네는 궁핍해서 때로 마네에게 편지를 써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너그러운 마네는 성심껏 도와주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상류층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법관이었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안은 매우 유복한 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마네가 당연히 법을 공부하고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술에 재능이 있던 마네는 어린 시절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드나들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인상파의 대부로 통하는 혁신적인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마네가 드나들었던 루브르 박물관의 모습
마네가 드나들었던 루브르 박물관의 모습

제도 안에서의 성공을 추구했던 현실 타협적인 면모

그러나 보수적인 집안 배경의 영향으로부터 그가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네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제도 안에서 성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도 가급적 인상파 전시회를 피하고 우리나라의 국전 격인 살롱 전시회에 지속적으로 출품했습니다. 진취적이고 근대적인 미학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기준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현실 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지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하는 성공을 얻지 못하고 오랜 시간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는 인상파 미술의 대부로서, 그리고 19세기가 낳은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이 마네의 이 그림을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자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이주헌
이주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 전공. ‘한겨레’ 문화부 미술 담당 기자, 학고재 갤러리와 서울미술관 관장 역임.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이야기꾼으로 활동, 미술로 삶과 세상을 보고, 독자들이 좀더 쉽고 폭넓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꾸준한 집필과 강연 진행. EBS에서 ‘이주헌의 미술 기행’, ‘청소년 미술 감상’ 등 프로그램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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