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묘미
현대 사극을 보면 조선시대 왕이 밤에 변장을 하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왕들은 거의 미행을 하지 않았다. 실록을 뒤져봐도 연산군의 비행장면을 부각하기 위해 몇 차례 등장할 뿐, 시정감찰을 위한 미행 기록은 없다. 그래도 비밀스럽게? 라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아마도 안했을 것이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에, 통금으로 인적도 끊긴 길에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왕들이 세상이나 민생과 담쌓고 산 건 아니다. 공식적, 비공식적인 여러 제도를 운영했다. 암행어사도 암행감찰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왕을 대신해 백성의 고충과 솔직한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게 주요 임무이다. 전국의 지방관이나 공무로 출장 가는 관리도 수시로 백성의 사정을 전했다.
‘풍문탄핵’이라는 것도 있었다. 대간(臺諫)이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 소문 들은 것으로 탄핵하는 것이다. 아주 비합리적이었고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었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정보 수집은 결국 사람을 통해 듣는 것인데, 그것이 말을 바꾸면 풍문탄핵이었다. 전화도 자동차도 SNS도 없던 시대에 대간이 일일이 확인하다가는 긴급한 민원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작용을 알면서도 운영의 묘라는 관점에서 적당히 용인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은 모두 왕의 눈과 귀를 관료들에게 의존하는 꼴이라 관료들이 자기네 구미에 맞는 말만 전달하고, 불필요한 정보는 차단하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 어떤 왕보다 이런 문제에 예민했던 왕이 영조와 정조였다.
조선 후기에는 누적된 공신 세력이 확대되면서 민원해결과정이나 고충처리방식이 자신들의 집단 이익이 반영된 형태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영조는 왕이 되기 전까지 궁 밖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그래서 영조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직접 행차하고 직접 대면해서 소통하는 방식이다.
조선의 왕들은 미행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외출도 잘 안했지만, 영조는 부지런히 궁 밖으로 나갔다. 영조는 총 909번으로 평균 한 달 반에 1번, 정조는 총 607번, 1달에 2번꼴로 행차를 했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도를 보면, 왕의 모습이 휘장을 쳐서 투명인간처럼 쏙 빠져 있는데, 이런 장면을 바꾼 왕이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신하와 경호군사, 시녀들까지 따라가는 왕의 행차를 조선시대 최대의 퍼레이드이자 볼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잦은 행차는 왕이 민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농사현황도 살피고, 백성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기 위한 깊은 뜻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민정시찰, 소통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영조는 행차 때마다 지나는 지역 사대부나 일반 백성 등 가능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때 누구를 만난다고 미리 알리면 관리들이 또 중간에 수를 썼다. 면담할 사람을 정해놓고, 할 이야기, 하면 안 될 이야기를 맞춰놓고, 말하는 것까지 연습시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영악한 영조는 이것도 예상하고, 행차 중 갑자기 관리를 지목해서 마을 유지를 모아오라고 한다. 파주 장릉(長陵;인조와 인렬왕후 능)에 갔을 땐 자신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신하 박문수를 시켜 주변 마을을 돌아 즉시 민원을 수집해오라고 했다. 박문수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계속 받는다. 하천이 범람해 농지가 망가졌는데 방치해 두고 있다’ 등등 정말 백성의 고충이 담긴 민원을 수집해오자 그 즉시 해결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왕이 아무리 열심히 백성을 만난다고 해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나가는 지역도 서울과 경기도 정도였고, 왕이 백성을 직접 만나 여론을 파악하고 민원을 처리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조직이 커지면 업무 분담은 당연한 것이다. 제도와 관원을 통해 민심을 수집하는 게 실은 올바른 방법이다. 하지만 인의 장막, 편파보고에 대한 방비는 해야 한다. 영조가 백성을 열심히 만난 건, 자기가 주기적으로 백성을 만나 얘기를 듣고 세상물정을 잘 알고 있으니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영조는 또 새로운 민원 시스템 하나를 만든다. 국가의 공식적인 시전상인과 대동법 이후 등장한 공납청부업자, 공인(貢人)을 위한 전문화된 고충처리 시스템이다. 조선후기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난전, 사상(私商)이라 불리던 상인들이 늘어나서 시전상인과 공인들이 상품 유통, 판매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파산이 속출했고, 정부관청의 물자조달에도 문제가 생겼다.
1752년(영조 28) 영조는 공시당상(貢市堂上)을 두어서 시전상인과 공인의 폐단과 고충을 바로잡게 했다. 다음해 박문수의 건의로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이 공시당상을 맡게 되었고, 공시인에게 폐단을 하나하나 물어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영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청계천 준설공사 때와 마찬가지로 시전상인과 공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만나는 자리에서 공시인의 고충을 들었다.
1769년(영조 45) 영조가 공시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채무폐단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상인들은 임금의 인척인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1,200냥,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영조의 사위)이 1,100냥, 홍자(洪梓)가 2,500냥, 송낙휴(宋樂休) 1,500냥 등 여러 명이 자신들에게 돈을 빌리고는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 했다. 이른바 ‘외상(外上)’을 진 사람들을 모두 고해바친 것이다. 영조는 빚진 자들을 잡아가둔 뒤 돈을 갚으면 풀어주도록 했고, 당시 공시당상과 실무자도 파직했다. 이후에 영조는 다시 상인들을 만나 잘 처리되었는지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공시인들이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영조는 무던히도 애썼고, 열린 채널을 만들었다. 또 대면하는 자리를 정례화하여 고충을 토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정조도 영조의 선례를 받들고 적극 활용해서 ‘금난전권 폐지’라는 조선후기 상업역사상 획을 긋게 되었다.
조직에는 수천, 수만의 위기 감지 센서가 존재한다. 정작 중요한 건 센서의 작동 여부가 아니라, 센서의 경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수많은 리더들이 센서의 진동을 놓치는 이유는 지적 능력, 정보 부족이 아니라,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다 보니 공감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경보가 전달되려면 먼저 공감이 필요하다. 영조가 직•간접 루트. 공식, 비공식 루트를 모두 동원하여 소통했던 것처럼 진정한 리더는 단순 민원 해결이 아니라, 센서의 진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왕이, 리더가 현장을 찾는 진정한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