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꾸준히, 서로의 마음이 연결되어가는 과정
그 동안 다양한 학교에서 수 많은 중학생들을 만나왔지만, 이번 학기에 만난 A반 1팀 아이들은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A반 1팀은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교류가 거의 없었고, 정적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우 수동적인데다가 저희가 말을 걸어도 눈치만 보고 침묵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표현을 통해 자기탐색을 하고, 타인의 모습을 보면서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활동을 맨 먼저 기획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동물 피규어를 선택하고, 그 동물 피규어가 살고 있는 환경을 꾸민 다음 거기에 각자가 창작한 이야기를 덧붙이게 하여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 겁니다.
아이들은 은연 중에 자신의 본심과 경험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집단원들 중 여러명이 공통적으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후에는 좀 더 큰 움직임이 들어간 활동을 계획했습니다. 2인 1조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관찰할 수 있는 초상화 그려주기 활동이었습니다.
하나의 집단이 되어가는 과정은 차근차근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아이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상대를 보는 회수가 많아졌고, 아직은 어색하지만 남녀 구분 없이 자발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갈등의 시작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양심이 없다
상대방 자화상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기 활동에서 혁주가 지아의 자화상 옆에 적은 한 마디입니다.
지아는 혁주가 적은 것을 보고 따지기 시작했고, 혁주는 최근에 지아와 다퉜던 일을 언급하면서 마음이 상했던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내 다툼이 커졌고, 순식간에 번져간 둘 사이의 갈등 탓에 집단의 분위기는 숙연해졌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서로의 눈치만 보며 침묵하던 예전의 모습으로 슬금슬금 돌아갔습니다.
치료사들은 이 갈등을 집단에 공론화시켜 집단원들이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학주와 지아와의 갈등 상황을 토대로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각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해 함께 나누고, 이를 <strong?공연작품으로 만들어 발표를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은 주로 어른들에게 학습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용기를 내 먼저 다가가서 사과를 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들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해하여 진정한 소통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직 힘들었을 겁니다.
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역할을 경험해보는 과정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는 작업을 위해 지난 자화상 작업에서 서로의 모습을 분석한 캐릭터를 맡아 연극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 다음과 같은 규칙을 조건으로 걸었습니다.
- 자기 캐릭터와 정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집단원의 역할을 선택할 것
- 내 캐릭터를 연기하는 집단원과 조를 이루어 인터뷰를 하고 대본을 작성할 것
아이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자기와 정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하라니! 상대방의 캐릭터를 잘 이해하기 위해 아이들은 친구에게 자신의 성격과 특징을 글로 써주기도 하고, 말로 알려주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상대가 왜 이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서로에 대해 궁금증이 커져갈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고 인터뷰가 계속되자 “이 친구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나와는 너무 다른데?’, ‘좀 더 알아보고 싶다’ 등 서로에 대한 궁금증은 점차 호기심과 관심으로 바뀌어갔습니다.
하지만 집단의 에너지 레벨은 여전히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연습이 순조롭지는 못했습니다. 너무 수줍어하며 타인을 의식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자신과 많이 다른 타인의 모습을 연기해야하는 부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아이들의 이런 상황에 돛을 달아주고 싶었습니다. 커다란 화선지를 펼쳐놓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의 소리는 자리에 앉아 글로 표현할 때 더 잘 드러났습니다.
학교에 대한 스트레스,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 좋아하는 친구에 대한 마음 고백, 현재 자신의 마음상태를 표현한 글 등이 자유롭게 지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수줍음 많은 아이들이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격하고 강렬하게 그 의미가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감정의 해방과 거침없는 표현을 경험하고 나서, 아이들은 더 안정되고 자신감 있게 타인의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초반에 경직되어 있던 아이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방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점차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을 그은 듯 명확했던 남녀 학생과의 경계가 점점 옅어지고, 서로 호감을 가지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탄력을 받은 저희들은 이 역지사지의 과정을 그대로 담은 연극을 11회기에 진행할 공연 무대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성별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과 최대한 반대되는 캐릭터로 배역을 확정하고, 대본을 완성하고 본격적인 연극 연습이 돌입했습니다.
공연이라는 커다란 목표의식이 생기니까, 아이들은 더욱 집중해서 자신이 맡은 역할, 실제로는 정반대되는 친구의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서로를 더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역할 바꾸기 ‘역지사지’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그와 정반대되는 자신의 모습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