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교실이 힘든 명희
명희가 중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날. 새로운 교실에 들어갔을 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어요. 최근에 이사를 다른 지역으로 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명희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다른 아이들도 다 서먹서먹하겠지.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친구는 이제부터 사귀면 되지!’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벌써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네요. 저 아이들은 동네 친구들인지 이미 친해져 있는 것 같았어요. 불현듯 명희는 불안해졌어요. ‘내가 벌써 뒤처진 건가. 저 아이들 틈에 내가 끼지 못하면 앞으로 학교생활은 이제 어떻게 한담?’
마음 털어놓을 친구가 없는 바쁜 동민이
동민이는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랍니다. 다른 아이들은 동민이를 부러워하지만, 동민이는 고민이 있어요. 학교 마치고 학원을 연달아 들렀다가 집에 가면 12시가 넘고, 주말에도 보습학원에 다녀요. 여유가 생기는 시간은 잠을 보충해야 하니 친구 만날 시간이 없네요. 쌓이는 스트레스를 하소연할 친구 하나 없는 게 너무 서글퍼요.
친구들과 화해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미영이
미영이랑 윤지, 서윤이는 반에서 저랑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윤지랑 저랑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던 뒤로는 미영이도 서윤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그저께까지만 해도 아이돌 얘기를 하며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었는데… 불과 이틀 만에 반에서 가장 서먹해져 버린 친구들이 되어버렸어요. 저는 아직도 베프라고 믿고 있는 아이들인데, 그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슬퍼요.
관계에 예민한 학생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문제는 인간 본연의 숙명이죠. 이 중에서도 명희나 동민, 미영이와 같이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자칫 사소해 보이는 관계에 관한 고민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성장하는 청소년 시기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의 발달 단계상 이전까지 전무했던 타인과의 관계 맺음과 미숙한 대처로 인한 경험들이 지속될 때, 자칫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지기 쉬운 시기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청소년들도 이 문제를 매우 중대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013년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초·중·고·대학생 상담 사례 총 3,139건의 분석을 따르면, 청소년 시기의 고민 1, 2위는 ‘정신건강’과 ‘대인관계’였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시기에는 대인관계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학교, 학원에서의 또래 관계 문제를 가지고 상담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또래 관계를 충분히 경험하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 이 시기에 굉장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청소년 시기에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의 문제, 집단 따돌림의 문제 또한 조그마한 관계의 엇갈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또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향상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 핀란드의 키바코울루(Kiva Koulu) 프로그램
1990년대 경기 침체 이후 핀란드 사회에서는 따돌림과 집단 괴롭힘이 큰 사회적인 이슈였습니다. 핀란드 교육부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르쿠(University of Turku) 대학 크리스티나 살미발리 (Christina Salmivalli) 교수팀과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 프로그램인 ‘키바코울루’를 개발하게 됩니다
키바코울루는 학교폭력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모든 학생이 학교폭력 예방 토론, 협동과업 수행, 역할극, 비디오 영상 상영 등의 다양한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3학년, 4~6학년, 7~9학년의 3단계 과정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1학년 학생들을 위한 강좌1에서는 학생들이 슬프고, 행복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로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역할극을 하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법을 배웁니다.
학교폭력 문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위주로 선발하여 진행하던 기존 프로그램과 달리 키바코울루는 해당 학년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크리스티나 살미발리 교수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가 바로 왕따를 막는 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따돌림이나 집단 괴롭힘 과정에서 방관자(bystanders)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키바코울루는 소수의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성 및 감성 학습, SEL(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프로그램
미국 사회 역시 1990년대 중반 이후 콜로라도 학교 총기 사건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 정신적 장애가 미국 교육의 가장 큰 당면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개혁 중 하나가 바로 사회•감성 학습(SEL) 프로그램입니다. 미국의 SEL 프로그램은 비영리단체인 CASEL(The Collaborative for Academic, and Emotional Learning)이 담당하고요. CASEL은 ‘학업 성취 이전에 사회적, 감성적 역량이 우선되어야 한다.’의 기본 정신을 가지고 미국의 각 주(州)가 수립한 SEL의 목표 기준에 맞는 프로그램을 학교 현장에 기획,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SEL 프로그램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자기인식, 자기관리, 사회적 인식, 대인관계, 책임 있는 의사결정” 이 5가지의 큰 프레임만 공유하고 주(州)마다 추구하는 SEL의 구체적인 목표 기준이 각기 다르고, 학교 현장에서도 그 목표 기준을 적용하는 형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에요. 대표적으로는 관계와 신뢰 쌓기를 중시하는 Caring School Community 프로그램, 반사회적 행동 예방에 목적을 둔 I Can Problem Solve 프로그램, 그리고 자기통제, 대인관계 발달을 목표로 하는 Promoting Alternative Thinking Strategies(PATHS) 프로그램 등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구체적 내용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미국 사회 대다수 학교들이 공통으로 학생들의 사회성과 관계 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교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회성 및 관계 향상 프로젝트 ‘마음톡톡 교실힐링’
핀란드의 키바코울루나 미국의 SEL과 같이, 우리나라 역시 아이들의 사회성 향상과 학교폭력 예방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자체 또는 학교에서 평화샘 프로젝트, 어깨동무 프로그램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GS칼텍스의 사회공헌 사업인 ‘마음톡톡’ 은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위한 예술치유뿐만 아니라, 건강한 관계 맺음과 사회성 배양에 초점을 맞추어 중학교 1, 2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마음톡톡 교실힐링’ 프로그램을 개발, 지난 2014년부터 27개 학교, 2천여 명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마음톡톡 교실힐링’은 키바코울루, SEL과 기본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생활 중에 관계 맺음과 사회성에 대해서 익히고 배우는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 시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통으로 학교 정규 수업시간 중에 최소 한 학기~1년 이상 편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학교폭력 예방 전문가인 사나 허카마 핀란드 투르쿠 대학 선임연구원은 “학교폭력 예방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지속해서 꾸준히 사회성을 단련시켜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교실힐링이 조금 더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예술치유의 방식을 프로그램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술, 연극 등의 예술치료사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그룹 내에서의 집단 역동과 관계에 대한 욕구를 들여다보고 그에 맞춤형으로 집단의 활동을 매번 기획해나갑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또래 관계가 더욱 견고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교실힐링 프로그램’의 기본 조건
- 한 학년 학생들 전부를 대상으로
- 한 학기 동안
- 정규 수업시간에 편성
‘관계에 대한 갈망’에 주목!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생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좋은 교수법을 도입하거나, 학생 개개인 인성의 전인격적인 수양을 위한 노력은 기울여도 옆에 앉은 짝꿍과의 관계, 반에서의 교우관계를 직접 살펴보고 증진시키는 시도는 그동안 많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또래 관계는 언제나 학생들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으로만 남아 있었고, 학교폭력이나 따돌림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야 사후에 수습되는 과정을 되풀이하였습니다. 학생들의 또래 관계에 대한 고민과 갈망을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여주세요. 교실힐링 뿐만 아니라 그들의 또래 관계를 돌보는 더욱 다양하고 많은 시도가 학교 현장에 접목된다면 우리 학생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기에 앞서 더 의미 있고 풍족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