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보는 석유] 제1편 – 석유의 역사
석유활용의 고대사
석유는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므로 석유의 역사는 인류사를 선행한다고 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형태의 기록과 흔적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석유사와 인류사가 처음 만나는 시기는 기원전 6,000년경 노아의 방주로써 방주의 틈새를 역청(Bitumen)으로 발라 방수를 했으며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이라의 부패방지를 위하여 천연 아스팔트를 사용하였고 기원전 600년경 바빌로니아인은 건축에 역청을 사용하였다.
석유의 상업생산
세계 최초의 상업유전은 드레이크 대령의 소형 천공기를 사용한 철관투입법으로 1859년 8월 29일 펜실베니아 타이터스빌 드레이트 유전의 석유탐사 성공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때 시작된 석유산업은 1870년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회사 설립으로 본격화되었다.
록펠러는 초창기에 미국시장을 지배하였고 유럽과 남미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스탠다드에 대항하여 1890년 네덜란드에 로얄더치석유가 등장하였으며 1907년 영국의 쉘운수무역회사와 합병하여 로얄더치쉘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은 1901년 중동지역에서 석유이권을 취득하였고 1908년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BP가 되었다.
메이저의 형성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석유는 전략물자로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11년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고속전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였으며 독자적 국영회사를 설립하기 위하여 앵글로페르시아석유에 51%의 출자를 결정하였다.
석유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동차, 전차, 비행기를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프랑스 클레망소 수상이 미국의 윌슨대통령에게 ‘석유 한방울이 피 한방울’ 이라는 휘발유 요청의 전문은 원활한 석유공급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석유의 교훈은 전쟁종결 후 세계 각국의 이목을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에 집중시켰으며 1928년 9월 앵글로페르시아, 로얄더치쉘, 뉴저지 등 3개 회사는 세계원유의 과잉생산을 억제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는데 이를 어크나카리협정(Achnacarry Agreement)이라고 하며 메이저에 의한 국제석유 카르텔의 효시가 되었다. 메이저란 국제석유자본으로 상류부문(원유생산부문)과 하류부문(수송, 정제, 석유제품판매부문)을 종합 일관한 거대기업으로 Exxon, Mobil, Gulf(현재 Chevron으로 흡수), Socal(현재의 Chevron), Texaco, Royal Dutch Shell, BP 등을 Seven Major 또는 Seven Sister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상황이 1920~1930년대 석유산업의 대세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능이 정지되었으나 전후에 재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나 연합군 모두 군수물자로서 석유자원의 확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41년 히틀러가 러시아의 바쿠유전이 있는 코카서스 지방 침공 계획은 결국 실패하였지만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1973년 제2차 중동전쟁시 석유를 무기화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아랍 세력을 제압하고 메이저들로부터 석유지배권을 빼앗아 버렸다. 이때의 혼란을 통해 ‘제2차 석유위기’인 유가폭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
각주 1) 우표는 실물크기의 70%, 기타자료는 50%로 축소하였으며, 봉피는 절단하여 게재
각주 2) 특별요금계기인(Meter Stamp) : 요금 별납의 일종으로 테마틱 분야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자료이며 각 회사들은 이를 이용하여 광고 효과를 누렸다. GS칼텍스의 계기인은 1968.12.18일로
국내에서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
각주 3) 자료18)은 일부인이 주제 ‘석유’와 일치하여 테마틱 자료로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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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창한 (전 GS칼텍스 공장혁신팀 차장)
본 콘텐츠는 1997년 3월부터 8월까지 GS칼텍스에서 발행한 사보를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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