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다9 – 민생경제의 수장, 잠곡(潛谷) 김육의 리더십
조선시대 역사에서 퇴계나 율곡 등이 높이 평가되는 것에 비하여, 김육의 평가에는 인색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김육은 조선 후기 민생경제 최후의 보루로 대동법을 목숨을 걸고 실현한 경제관료이자 학자였으며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체험해낸 현실주의자로 재평가 받기에 마땅한 인물입니다.
민생 경제 최후의 보루, 김육
청나라가 득세하자 명분에 집착한 조선 사대부들은 나라의 사정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명나라에 대한 의리만을 고집하며 무모한 북벌론을 꺼내 들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육은 온 나라가 축성과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때 홀로 먹고 살 양식도 없는 백성들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 모두가 ‘Yes’라 할 때 유일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확고한 소신과 강한 실천력을 갖추고 경제의 실무 전체를 꿰뚫고 있던 실력가이기도 했습니다. 김육은 1638년부터 대동법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작업을 착수해 나갔습니다. 그는 무려 20년 동안 대동법 실시를 줄기차게 주장하였고, 한 가지라도 할 수 있으면 물러서지 않고 그것부터 실현하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쌀이나 베로 받은 제도입니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습니다. 또 방납(防納:대납),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등 관리들의 부패와 해악으로 농민부담이 커져 있어 김육은 이를 중지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도 늘어나고 백성은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 현명한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그 동안 몇 번이나 실현에 옮기려다 부정부패에 얽힌 관료들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미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김육은 서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이 제도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어 끝내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또한 김육은 1627년 이전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동전 유통을 실현코자 효종 때에 이를 거론하여 여러 난관과 장애를 무릅쓰고 무려 7년간이나 계속해서 정책에 반영하도록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비난과 정치적 불리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김육은 파당적 이해나 자리의 보존을 위해 소신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실패와 난관을 헤쳐 낸 뚝심의 경제관료
1580년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난 김육은 퇴계의 제자에게서 글을 배우고 독학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꾀한 합리적인 인물로 명분도 거부하진 않았지만, 실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조화형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출신 가문이 비교적 한미했던 탓에 가문의 입김이 없었고 특정 학맥에 속해 있지 않은 채 대부분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기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김육은 청장년기에 운도 없고 견제도 심해 출사가 늦었으나 인조반정 후 아주 늦은 나이인 45세 때에야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인조 때는 정치적 풍랑도 많았으나 인조 서거 이후 예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우의정으로 올라 재정에 관한 7개 조항의 개선책을 제시했습니다. 제시한 모든 정책은 경제와 관련된 것이어서 김육의 관심이 백성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해법으로 대동법을 제시한 것이고 대동법 하면 김육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출사는 늦었지만 굵직한 삶을 살았던 김육의 성공 비결
그는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 수 있는 50대에 들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개인적인 탁월한 능력과 청빈한 성품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경제에 올인한 전문지식으로 조선 최고의 경세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김육은 학자이자 실무형 고위관료였고 현장에 가장 밝은 목민관 출신이었습니다. 음성현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선정을 펼쳤고 1627년 청(淸)나라가 쳐들어오자 호패법을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체찰사 김류(金)를 수행하여 남쪽지방을 순행하며 민심을 살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김육은 늘 백성의 곤궁한 삶을 살폈습니다. 이후 그는 명과 청을 드나들며 선진 문물을 배웠고 경제의 유통을 위해 동전과 수레와 수차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선진세계의 경험이 사상과 철학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조선 중후기 경직된 조정에서 그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소신을 마음대로 펼치며 주장한 인물의 예는 찾기 힘듭니다. 영의정까지 오른 김육은 죽을 때조차 효종에게 간절한 국가시책을 제시하는 마지막 충성을 불태웠습니다.
그가 죽자 효종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79세였습니다. 김육이 살아 돌아온다면 오늘날 명분과 실리 싸움으로 정작 돌보아야 할 민생을 놓치고 있는 정부 관료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내릴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