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국방전문가로 활약한 역사 속 위인!

 

 

역사에서 배우다8 –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국방전문가로 활약한 대표적인 역사 속 위인!

 15세기 서양에서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과학적 연구에 빼어난 천재적 재능을 보인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면, 그로부터 3세기 후 조선에 태어난 정약용은 다빈치 이상의 재능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보통 정약용하면‘ 목심심서’와 수원 화성의 기중기 등을 떠올리는데 사실 그는 무기, 과학, 국방 분야에도 빼어난 실력을 갖춘 실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을 가리켜 조선의 다빈치라고 부르는 것에 과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천재적 재능을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독도를 둘러싼 국방 문제가 초미의 관심이 되고있는 지금 이 때, 정약용의 재능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탐색일 것입니다.

 

무법 무소불위의 세력을 혁파하라

 예나 지금이나 법을 무용화하려는 집단이나 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해지기 마련입니다. 정약용 생전의 정치와 사회가 그 모양이었습니다. 비록 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은 중앙 정부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지방에선 지방 관료가 곧 임금이나 마찬가지인 전방위적 권위를 휘둘렀습니다. 조세와 방위, 치안을 휘어잡은 관리 앞에서 백성들의 곤경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조세와 방위, 치안등 모든 권리를 휘어잡은 지방 관리들
조세와 방위, 치안등 모든 권리를 휘어잡은 지방 관리들 때문에 조선의 앞날은 캄캄했습니다.

 
 당시 정약용은 무법천지의 조선 정치사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법에는 분명히 아버지와 자식이 넷이 되면 하나는 군을 면제해 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정은 8부자가 다 군역을 해도
나라를 원망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린아이를 군대에 충당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정은 태어난 지 3일 만에 충당해도
원망을 하지 못한다. ”

 

군역과 세금으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정치집단이 존재하는 한 조선의 앞날은 캄캄한 것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이들을 혁파하고 병농 일치의 국방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미래에 반드시 제2의 임진왜란이 닥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져 한일합방의 치욕을 맞고 말았습니다.) 정약용은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항시 조선을 넘보고 있는 일본을 철저하게 견제하고 국가의 군사 조직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군편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약용이 제시한 국가의 군사조직을 보완하고 지원할 수 있는 민간방위체제의 요체는 ‘민보의(民堡議)’에 저술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은 학자이자 사상가, 행정관료로서의 면목이 두드러지지만 ‘민보의’에서 나타난 그의 생각을 읽어보면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조선예비군제도를 창설하고자 ‘민보의’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부실한 지방 군사력의 실태를 개편하고 유사시에 활용할 실용적인 방위체제를 갖추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청야이고루(淸野而固壘)’전략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성으로 들어가 곡식을 쌓아두고 지구전을 편다는 ‘선수후공(先守後攻)’의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지방 군사는 속오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군기가 허술하고 지방관리나 양반들이 법령을 우습게 보았던지 총은 화약이 녹슬고 군인은 죽은 사람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막상 전쟁이라도 나면 전혀 대비할 준비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청야이고루 전략
정약용의 ‘청야이고루’ 전략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지구전을 피는 ‘선수후공’의 전략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에 정부군과 지방군이 몇 개월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던 것이 그런 폐단의 결과론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정약용은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사원이나 버려진 성곽, 산성, 높은 담장 등을 다 이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자연적인 성곽이나 담장을 보강하여 방어용 성곽을 건설하고 그에 속한 농민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하다가 유사시에 전투 인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위해 각 개인에게 지급할 양식의 양과 지휘체제의 기본 규칙, 전술적인 공격 방어책, 게릴라식 유격전법까지 자세하게 기술하여 ‘민보의’가 지방 방어책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또 지방의 농어민들이 군인들을 보좌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훈련도 받고 각 지역의 ‘민보’끼리 공동 작전과 공동 농업을 진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같은 개념으로 한 손에는 병기를 한 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임전무퇴의 자세로 싸우자는 캐치프레이즈를 연상케 합니다.

 

키부츠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협동농장’을 의미 합니다.

 

공동체 이상향의 건설을 목표로

 정약용의 ‘민보의’는 단순히 방어적인 개념만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공동체적인 구성을 통해 자체 방위 뿐 아니라 물자를 공동 관리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공동생활의 장으로서의 기능까지를 담고 싶어 했습니다. 민보제도의 실현을 통해 개인의 힘을 모아 전제 집단의 힘을 키우고 내부적으로는 공동 생산 공동 분배의 정신을 실현하여 농촌 부강의 활로를 찾아내자는 이상향 개발이 그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현실을 인정하되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자치제의 이상향이 민보제도라는 것을 그는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후일 일본이나 이스라엘 등에서 이미 실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하게 현실화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주장은 당시 정조의 사망 이후 김씨 세도정치가들에 의해 무시되었고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내침으로써 족벌정치, 세도정치만 강화하는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약용의 민보의 제도
정약용의 ‘민보의’는 오늘날의 예비군 제도로써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의 ‘민보의’주장은 고종 때 들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종 4년 1867년 조정에 의해 현실적인 방어책으로 인정되어 공인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선의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다음이라 이는 실제로는 크게 빛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후일 현대 한국방어전에서 예비군제도가 생김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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