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대일 외교관, 신숙주의 일본을 다루는 법

 

 

역사에서 배우다7_ 일본을 다루는 법 신숙주의 대일론(對日論)

독도 문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의 기습적인 전략은 도를 넘어 섰는데 우리의 대응은 갈팡질팡하며 혼선을 초래하고 있어 외교상의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정말 다루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미 550년 이전에 일본을 간파하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다루는 방법을 제시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신숙주입니다. 신숙주는 사육신을 버린 변절자라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조선 시대 최고의 대일 외교 전문가였습니다. 이 글은 그의 경륜과 지략을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대일 외교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독도 문제
대일 외교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독도 문제, 만약 신숙주가 지금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 해법을 내놓았을까요?

 

15세기 동아시아 정세를 읽다

신숙주는 동서고금의 군주론에 대한 깊은 사고와 통찰을 가졌고 외교, 즉 국제정치에 민감한 시각을 가진 실력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평생에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중국을 열 세 번이나 다녀오며 중원의 학문과 동아시아 시대 변화를 읽는 눈을 길렀습니다. 신숙주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이는 사실 세종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문장가이자 학사로 소문난 예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신숙주와 성삼문을 내보내 학문의 깊이를 겨루게 했습니다.

명나라의 일급 문신이자 학자였던 예겸은 거만을 떨다가 예상외로 강적을 만나자 감탄만 거듭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며 신숙주를 중국의 굴원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으로 이름난 인물입니다. 그 결과 세종은 신숙주를 집현전 학사의 최고영예인 직제학으로 제수케 했습니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수양대군은 이를 지켜보며 신숙주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수하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후일 정란을 일으킨 뒤 그를 정치외교의 지휘자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세조가 발견해 낸 신숙주의 장점은 바로 일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이해타산에는 누구보다 소극적이었지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그 어떤 이보다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조가 정권을 잡기 위해 한명회 같은 모사를 썼다면 통치의 최고 참모로는 신숙주를 썼습니다. 특히 신숙주는 외교와 문화 통치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조 즉위 후 그는 예문관대제학, 1456년엔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일사천리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영의정이 된 것이 1462년으로 겨우 45세였으니 40대 기수로 정승의 반열에 오를 만큼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입니다.

 

외국어 실력으로 일본에서도 인정받다

신숙주의 독서 버릇은 소문난 바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술이 취해도 반드시 자다가 깨어 글을 읽고 잘 정도로 독서광이었으며 외국어에 능통해 명과 일본, 여진의 정세 변화를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세조 등극 이후 동아시아 선린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신숙주는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을 정리해 성종에게 바쳤습니다. 이 불멸의 명저가 바로 ‘해동제국기’(성종 2년 12월)입니다.

해동제국이란 일본 본국과 이키섬(一岐), 큐슈섬(九州) 및 쓰시마(對馬) 양도와 유구국(琉球國)의 총칭입니다. 이 책은 일본을 가장 잘 이해한 책으로 현재도 일본 학자들에게 최고의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일본을 해박하게 살폈던지 당시 신숙주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학자와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문사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몰려왔다고 합니다.

신숙주는 일본의 교토에 도착하여 막부장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협정을 맺어 일본과의 교린의 길을 공식화하였을 만큼 일본어에 능통했고, 이미 그들의 속내를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신숙주의 외국어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 공이 한(한), 왜(왜), 몽고, 여진 등의 말에 통했으므로 때로는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하더니 뒤에 공이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여 바쳤으니 이에 힘입어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필요가 없었다.”

‘연려실기술’ 세조 고사본말, 신숙주 조

 

기록으로 일본을 경계토록 교훈하다

신숙주의 탁월함은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일해 온 외교의 모든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조선과 일본 무역의 중요성을 알리는 한편 일본의 핵심 지도층들이 권력이 나누어져 있으니 누구를 어떻게 상대하고 파악하라고 정리해 둔 일종의 외교비망록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그들이 조선에 오는 것은 무역상의 이익을 꾀하려는 것이므로 보내는 것을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을 박하게 하면 회유할 수 있어 침입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회유가 쉽지 않으므로 한 번이라도 경계를 게을리 하면 남쪽을 지키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도 특별히 성종에게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과의 화평을 해치지 말도록 주청했습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왕들은 그의 외교에 대한 충언을 깊이 받아들였으나 이후 일본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여 결국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그 이후에도 구한말의 한일합방까지 초래하고 말았으니 신숙주의 외교철학을 후손들이 본받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쉽지 않은 우리의 대일 외교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처리해야 할지, 우리 정치가들과 대일 비즈니스맨들이 신숙주의 경륜을 보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숙주의 외교철학으로 대일관계 해법 찾기
신숙주의 외교철학을 통해 현재의 대일 외교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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