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극복의 리더십 – 조선을 지킨 서애 유성룡의 리더십

조선을 지킨 서애 유성룡의 리더십

 

역사에서 배우다4_ 위기 극복의 리더십, 유성룡

 최근들어 고유가와 달러화 약세, 원자재 상승과 식량 부족 등으로 한국 경제와 기업의 앞날이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요즘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분야가 미래학 연구라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지만 미래의 예측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나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전해지는 솔로몬 왕도“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장탄식을 하지 않았습니까?

 

국란 극복의 결정적 선택 주도

 영웅이 일반인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위기 국면을 만나면 자신이 가진 경륜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리 역사에서 위기 극복의 리더십을 가장 잘 발휘한 인물을 들라치면 필자는 서슴없이 서애 유성룡 선생을 들고 싶습니다. 유성룡에게서 배우는 위기 극복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금과옥조의 교훈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유성룡의 특별한 능력은 임진왜란 초기, 선조의 비겁한 피난길에서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리더가 갖는 장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안목이 아닐까요. 유성룡은 당시 16세기 말 동아시아의 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눈을 가졌기에 정쟁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1592년 4월 14일과 15일 부산진성 및 동래성이 함락되고 20일도안된5월 3일, 수도서울에일본군제1, 2, 3군이 무혈입성을 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미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 대부분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하면서 나라의 존망이나 국민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던 선조는 승지 이항복에게 명나라에 기대 몸을 보존하면 어떠냐고 슬쩍 흘렸습니다. 선조수정실록 5월 1일자 기록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어가(御駕)가 의주(義州)에 머물 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조선이 살아남아 항거하는가, 명나라의 속국이 되는가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선조가 다시 유성룡의 의견을
물었다. 이 때 유성룡은 선조의 참모로서 가장 중요한 결정적 선택을 주도한다.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朝鮮)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 고집을 피운다. 실록을 보면 선조는“내부(內附, 중국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유성룡은 계속해서 반대하며 승지 이항복을 꾸짖었다. 관동과 관북 지역이 있고 호남에서 의병도
일어날 텐데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라는 질책이었다.

이 말에 이항복이 놀라서 사과하고 유성룡의 단호함에 밀려 조정안에서는 더 이상 어가가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선조가 의주를 지나 명나라로들어갔으면 그 때부터 조선 땅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누가 이기든
조선 땅은 승자의 속국이 되고 말았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능력 위주의 파격적 인사정책

 임진왜란은 조선이 겪은 최대의 난국 상황이었습니다. 함경도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일본에 유린당했고 국가 경제력의 70%가 궤멸되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유성룡이 장부상으로 파악한 당시 전력은 조선군 총병력이 14만 5천 명이었지만 수도 방위만 북방 수비대의 2만 3천 명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보급인원 등을 빼고 나면 8천 명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소집된 인원은 백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유성룡은 이런 상황을 미리 살펴 조선의 살 길을 위해 일찍부터 두 가지 방책을 제시했는데 그 하나는 인재 추천, 또 하나는 전략전술의 변화였습니다. 유성룡이 연공서열을 지켰으면 이순신은 임란 때 육군에서 몇 백 명을 데리고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성룡은 전란이 있기에 앞서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자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대비해 형조좌랑 권율을 의주목사에,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몇 단계나 뛰어넘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승진인사를 단행한 것 입니다. 눈치나 보고 구설수를 겁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순신과 권율을 뽑아 두었기에 임란 2대첩(한산대첩, 행주대첩)을 엮어낼 수 있었으니 그의 탁월한 혜안을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성룡은 선조 26년 평양이 탈환되고 전세가 다소 유리해지자 군사의 훈련과 우수한 병기를 제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 훈련도감의 설치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시스템을 제대로 정비해야 국가 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위기 극복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시스템을 이야기한 것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1593년(선조 26) 유성룡이 주장하고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권유하면서 훈련도감 설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낸 리더

 그러나 유성룡의 관운에는 먹구름이 끼고 있었습니다. 선조가 그를 견제하며 정적으로 여긴 탓입니다. 그럼에도 유성룡은 선조를 적대시하지 않고 속 좁은 선조에게 양보하면서도 실리는 챙겨내는 재능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선조가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문제를 결정해 주기를 바라자 세자에게 아예 양위하겠다며 몽니를 부렸지만 선조를 달래 양위 소동을 중지시킨 것도 그가 한 일입니다.

대동법 실시와 천민, 노비를 양민으로 바꿔주고 세금과 병역 의무를 지게 하는 제도 역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망설이는 선조를 설득해 시행했습니다. 콧대 높은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주눅이 든 선조를 지키고 그의 위엄을 살려준 것도, 심지어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이나 외교 문서의 작성에서 선조를 세우고 중요한 전술전략을 제시한 것도 유성룡이었습니다. 이처럼 유성룡은 전란의 위기 현장에서 선조와 줄다리기를 하며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군주의 재목이 부족해 지혜로운 참모를 끝까지 견인하지 못한 것이 선조에게나 유성룡에게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 군주에 대한 불평, 불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손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고 전란의 자초지종을《징비록》으로 남겼고 그의 경륜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데 전력했습니다.

유성룡은 이처럼 어떤 환경의 어려움이 닥쳐와도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냄으로써‘CEO를 보좌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가야 하는 이 시대의 스텝들이 본받아야 할 진정한 참모상을 보여준 우리 역사의 참 영웅이자 리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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