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세종과 함께 한 역사의 인물들

 

세종대왕의 인재등용

세종대왕은 끊임없는 노력과 전진으로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북방의 6진을 개척했으며, 과학기술을 꽃피웠고 음악 및 예법마저 정리했습니다. 불과 31년의 치세 동안 대단히 많은 것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세종 혼자 이뤄낸 것은 아닙니다. 그의 빛나는 업적 뒤에는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신뢰하고 훌륭하게 다룰 줄 알았던 세종의 리더십에 주목해봅시다.

세종의 시대에는 명재상 황희를 비롯해 과학의 장영실이 있었고 음악에는 박연이, 북방 개척에는 김종서가 있었으며 문학에는 변계량, 정인지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종의 브레인인 집현전의 학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를 살펴보면 다른 시대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인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때였다. 그 많았던 인재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세종의 시대는 하늘이 내려준 행운의 결과였을까요?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태조 6년(1397) 한성 준수방(俊秀坊, 지금의 3호선 경복궁역 일대)에서 세종이 태어났을 때, 훗날 그가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셋째 자식이었던 그가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정권다툼에서 승리했고, 큰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별다른 후계자 교육도 받지 못했고, 인턴(세자)이 된 지 2개월 만에 조선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준비된 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종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무엇을 준비했을까요? 답은 인재 등용에 있었습니다. 왕이라도, 천재라도 나라의 모든 일을 혼자서 꾸려나갈 수는 없습니다. 세종은 전문 인력을 골라 그 정책-프로젝트 추진-을 전담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인재 “황희”

세종시대의 유명한 인재라면 역시 18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황희를 들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는 동네 아이들이 자기 집 복숭아를 다 따 먹어도 허허 웃기만 했던 인자한 노인이자 청렴했던 정승의 귀감으로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실제 황희는 이와는 꽤 다른 모습입니다. 청백리이기는커녕, 본인과 아들들의 부정축재 혐의로 몇 번이나 곤욕을 치렀고 사위가 사람을 죽인 일을 숨기려다가 들통나기도 했으니, 공직자로서의 도덕성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황희를 처벌하는 대신 감쌌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아낀 인재라는 것, 그리고 재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가면서. 물론 그런 이유가 다는 아니었습니다. 황희뿐 아니라 세종의 사람들은 어딘가는 꼭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종시대 또 하나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은 우유부단하고 물렁물렁했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는 욱하는 성미가 있어 주변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고 사이가 나빴습니다. 외곬수라서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던 것은 음악제도를 정리했던 박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박연은 빠릿빠릿하지 못해 업무 실수가 잦았습니다. 명문장이었던 정인지도 행정 처리에는 영 미숙했습니다. 윤회는 알콜중독 수준의 술꾼이었고 변계량은 아내를 학대해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나마 장영실은 천민 신분만 문제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나은 편이었을까요?

아니, 세종대왕이 그런 문제 많은 사람들을 등용했을까? 라고 하면 바로 그렇습니다. 세종의 인재라는 사람들은 잘 뜯어보면 모난 구석 많은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서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으며, 바로 그렇기에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위대한 것입니다. 적절한 인재를 골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을 어떻게 부리느냐는 것입니다.

황희에게는 분명 많은 장점들이 있었습니다. 정승으로 있으면서 많은 인재들을 추천했으니, 허조, 김종서, 최윤덕, 장영실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개성 넘치는 인재들이 가득했던 당시의 조정을 지휘해서 배를 바다로 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의 인재들에게는 결점도 있었지만 저마다의 장점이 있었고, 세종은 그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분야에 배치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으며 온갖 비방과 모략에서 지켜주었습니다. 아랫사람의 재능을 깊이 신뢰하며 그들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 것입니다.

 

인재들의 마음을 얻은 세종대왕

솔직히 세종이 고른 인재들은 왕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습니다. 세종의 의견과 다른 내용을 주장하거나, 정책을 추진 하다보면 세종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명색이 나라의 왕인 세종이니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을까요. 호통을 치고 으름장을 놓으면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세종은 오히려 신하들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했으며, 때때로 자신의 뜻을 굽히며 현장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업적들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졌고, 세종은 신하들의 복종이 아닌 마음을 얻었습니다.

더욱이 세종은 신하들에게 각 정책의 진행을 맡겼지만, 스스로도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공부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고안해내었으니 한글, 자격루 등이 바로 이런 결과물이었습니다.

세종의 학식과 능력은 신하들이 감히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박연이 갓 만들어낸 악기 편경(編磬)을 연주했을 때, 돌 하나가 미처 다 갈려지지 않아 미묘하게 높은 음을 내는 것을 알아차린 일화도 그렇고, 훈민정음의 창제에 반대하던 최만리에게 언어학 지식으로 맞받아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왕과 신하가 함께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經筵)이 세종의 치세 동안 1800번 넘게 벌어졌다는 사실은, 세종이 노력하는 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탄생한 자격루, 한글
노력하는 왕 세종대왕으로 인해 자격루와 한글 등이 탄생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종이 인재 복이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재들이 임금 복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황희나 장영실이나,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세종을 만나지 않았다면 조금 별난 어중이떠중이로 늙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 역시 기반을 든든하게 다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대는 조선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황금기로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