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 비범하지 않아서 효과적인 리더십

“저기 저 아래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무엇이냐?”

모처럼 야외에 거둥한 여왕은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측근들에게 물었습니다.

“김유신 공이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합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여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누이 문희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에, 여왕의 눈길은 곧바로 고개를 숙인 김춘추에게 가 꽂혔습니다.

“네가 불장난을 벌였구나?”
“∙∙∙∙∙∙∙∙∙.”
“네가 저지른 일은 네가 수습해야지! 빨리 가서 그녀를 구하라!”

김춘추, 김유신 여동생과 결혼하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정식으로 혼인하게 되었고, 이들 처남과 매부는 장차 왕(태종무열왕)과 왕에 버금가는 자리(태대각간)에 오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백제를 쓰러트리고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게 되죠.

이 에피소드는 누이를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기 위한 김유신의‘쇼’였으며, 김춘추가 처음에 문희와 정을 통한 것부터 김유신의 계획이었다고《삼국유사》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김유신은 그렇게까지 해 가며 혼인을 성사시켜야 했을까요? 이유는 둘 중 하나, 또는 두 가지 다일 것입니다. 김춘추 본인이 정작 결혼할 뜻은 없었던지, 두 사람의 힘이 결혼으로 하나로 맺어지는 것을 꺼리고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던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춘추는 당당한 신라의 귀족이었으나 진골 출신으로 대대로 왕위를 계승해온 성골보다는 격이 낮았습니다. 김유신도 진골인데 그나마 멸망한 가야의 왕족이기에 병합 과정에서 진골에 편입된 처지라,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포부를 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들‘사람의 아들’과‘어둠의 자식’이 문과 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신의 아들’들의 입지를 위협했으니, 성골 귀족들에게는 둘이 힘을 합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것입니다.


비주류 영웅들의 힘이 필요했던 선덕여왕

그런데 이 비주류 영웅들의 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덕여왕이었습니다. 그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건 전례에 없던 일이기에 반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즉위하기 전에는 칠숙과 석품이, 즉위한 후에는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 칼을 거꾸로 잡기까지는 않았어도, 오늘날 툭하면 “이게 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렇다”하듯 흉년이 든다거나, 도적떼가 일어난다든가 하면 으레 “이게 다 여자가 왕이 되어서 그렇다”는 푸념이 사방에서 일었습니다. 그런 아니꼬운 눈길은 국내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국.내외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국.내외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국.내외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의 태종은“너희 나라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여자를 왕으로 삼느냐”며 신라 사신들을 놀려댔습니다. 이런 불신과 의심을 무마하고자 유명한‘지기삼사(知機三事)’, 즉 여왕이 향기가 없음을 들어 그림 속의 꽃이 모란꽃임을 알아보고,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고 적의 침공을 알아내고, 자신이 죽을 날짜를 내다보았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실제의 모란꽃은 향기가 있음에도 미루어 알 수 있듯, 이는 대체로 여왕이 왕 노릇하기에 충분히 총명하고 신통하다는 선전을 하기 위해 조작된 허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재능을 이끌고 발휘하게 만드는 재주

그러나 신화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여왕은 능력이 있으면서 기득권 세력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김춘추, 김유신 등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신을 보좌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불장난’ 자체가 김유신만의 각본이 아니었고, 여왕과의 공동각본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 선덕여왕의 대표적인 측근 중 한명이죠.
김유신 장군의 동상, 선덕여왕의 대표적인 측근 중 한명이죠.

 

정상적으로 혼인을 추진했다면 김춘추가 거절하는 것이 문제일 뿐 아니라, 두 사람을 질시하는 성골 귀족들에게 은근히 방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이 혼인 문제를 공론화시켜 버렸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판인데 혼인에 대놓고 반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장본인인 김춘추가 할말이 없었음은 물론, 귀족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혼인은 모두의 승인 속에서 성사되었을 것이고, 여왕의 정치적 입지도 이로써 탄탄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선덕여왕이 그렇게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신라의 중흥과 삼국통일은 선대 왕들, 그리고 김춘추, 김유신 등의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지기삼사’보다 더 탁월한 선덕여왕의 지혜는 바로 불리한 정치적 입지를 극적으로 역전시키고, 여자의 몸으로 보수적 신라 왕국의 임금 자리를 거뜬히 해낸 데 있지 않을까요?

선덕여왕의 모습

측근들의 재능을 이끌어,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리더십이였습니다.

 그녀는 김춘추나 김유신보다 재능이 뒤졌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용하고 재능을 발휘하게 만들어준 것이야말로 그녀의 리더십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많습니다. 자신이야말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났다기보다 잘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일하도록 이끌어 주는, 향기 없는 꽃과 같은 리더가 진정 나라에 필요한 리더일 수 있습니다. 위기를 맞이해 진정한 리더가 아쉬운 오늘날,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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