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의 눈물 – ‘통일’된 조국에 그가 설 땅은 없었다

역사에서 배우다11 – 해상왕 장보고의 눈물, ‘통일’된 조국에 그가 설 땅은 없었다

최근 일본의 오사카 박물관은 한 목조 인물상을 50년 만에 처음 공개했습니다. ‘신라 명신(明神) 좌상’이라는 9세기 무렵의 이 인물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해상왕’ 장보고였습니다. 옌친이라는 일본 승려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도중 동해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장보고의 선단이 도움을 주어 목숨을 구하였고, 그 보답으로 그의 목상을 새겨 ‘신라 명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신라인 장보고가 일본 땅에서 신으로 모셔질 만큼 국제적 명성이 높았다는 점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를 본거지로 했던 그가 동해의 여객선을 보호할 만큼 넓은 범위까지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입니다. 장보고, 그는 해상왕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블루오션을 개척한 장보고

장보고 인생의 시작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그러니까 신라에 병합된 백제 지방 출신이었으며, 그나마 미미한 평민의 자손이었습니다. 귀족도 아니면서 피정복지 출신이라? 골품제라 하여 모든 것을 엄격한 신분제에 따라 결정했던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는 김유신처럼 무공을 세운 뒤 중앙 정계에서 활약할 수도 없고, 최치원처럼 글공부를 해서 명성을 떨칠 수도 없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신라, 장보고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로 인하여, 신분상승에 큰 어려움이 있었던 장보고

그러나 한낱 필부로 조용히 일생을 마치기에 그는 천하장사를 자처할 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지도력,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거대한 포부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 야망의 사나이에게 남아 있는 ‘블루오션’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었습니다. 즉 무한히 넓게 펼쳐진 바다를 무대로 전쟁과 무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 청해진, 장보고
장보고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블루오션은 바로 넓게 펼쳐진 바다였습니다.
장보고는 바다에 인생을 걸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도 포착했습니다. 대륙에서는 당나라가,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질서를 잡아가고 있던 반면 바다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었습니다. 무질서 속에서 해적질과 노예무역이 판을 치고 있었죠. 장보고는 여기에 손을 써서 바다가 보다 질서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상인들, 농민들, 그리고 각국 정부관료들의 지지를 하나로 엮어내어 거대한 조직을 만들 기반을 얻습니다.

완도의 청해진이 그 근거지였고, 신라와 당나라에서 모두 얻은 벼슬을 명분으로 하여 타고난 지도력과 담력을 무기로 하나씩 둘씩 해상 세력을 재편성하기를 10년여, 마침내 청해진은 고대 동아시아 바다의 수도가 됩니다. 그 수도에서 군림하는 바다의 왕은 물론 장보고였습니다.

귀족이자 권력자가 되려는 욕심

그러나 장보고는 인생의 시작도 그랬듯 끝도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욱 비참하고 한스러운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가 해상왕이 되는 과정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여러 해적이며 무역상들의 원한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임금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쥔 그를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재촉한 사람은 누구보다 장보고 자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왕이 부럽지 않은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끝내 채워지지 않은 공허, 이루지 못한 욕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지에서, 신라 땅에서 당당히 대접받는 귀족이자 권력자가 된다는 욕심이었습니다. 기회는 837년, 신라 왕실의 왕권 다툼에서 장보고가 힘을 실어준 쪽이 승리하고, 신무왕이 즉위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장보고는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고, 신무왕은 그에게 더 높은 벼슬과 많은 땅을 주었으나 이미 장보고에게 그런 것은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엽전, 장보고, 재물, 귀족
더 높은 벼슬과 땅을 주었지만, 장보고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내 딸을 왕비로 삼아 주시오!” 백제 출신에다 평민인 그가 유서 깊은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신무왕은 난처했습니다. 장보고의 은혜와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엄격하기가 강철보다 더 단단한 골품제도 질서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뒤를 이어 문성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왕의 장인이 되고 싶다는 뜻을 다시 전달했습니다. 이번에도 무시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신라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어수선해졌습니다. 최고 왕족과 귀족들이 머리를 싸매고 대책을 의논한 결과, 답은 하나였습니다. 아무리 곤란해도 비천한 백제 평민과 신성한 왕실이 피를 섞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떡한단 말이오? 장보고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 “가만히 있지 않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지!”

골품제도 수호에 쓰러진 해상왕

결국 한국사상 가장 넓은 공간을 다스렸던, 위대한 사나이의 운명이 결정됐습니다. 조정의 밀명을 받고 청해진에 뛰어든 염장은 장보고가 베풀어준 환영회에서 숨겨둔 칼로 그를 찔러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은 붕괴되었고, 동아시아 바다를 하나로 통일했던 거대한 제국은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해상왕에 만족하지 않고 귀족의 허울까지 탐냈던 장보고도 문제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명색이 ‘통일’왕조로서 고구려와 백제 출신자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부족국가 시대에 성립된 낡은 골품제도만 고집했던 당시 신라 귀족들의 좁은 소견이 더 문제 아니었을까요?

2009년 1월,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세계사에 가장 드높인 나라이면서 인종 문제만큼은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이 나라도 드디어 소수민족 출신의 지도자를 갖게 된 것입니다. 로마나 사라센, 몽골제국 등 역사상의 위대한 나라는 하나같이 소수민족에 대한 관용과 기회를 베푼 것으로 번영의 밑거름을 삼았습니다.

신라는 장보고라는 불세출의 인물을 얻었으나 포용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애써 이룬 통일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 전체로 봐도 잠시 빛났던 해양제국의 빛이 덧없이 스러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과연 배울 것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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