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이야기 7 – 소줏고리로 빚는 예술

소줏고리로 빚는 예술, 전통주

우리 술 이야기 7 – 소줏고리로 빚는 예술

우리나라 술의 역사 가운데 가장 부흥기라면 당연 조선시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래 전부터 우리 술은 그 맛과 향에 있어서 단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지만 고려시대 말엽 증류주 기법이 원나라로부터 전해지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증류방법을 알기 전에는 제 아무리 술을 잘 빚어도 알코올 도수는 20`를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알코올 도수 20`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효모가 발효를 시작하여 당분을 알코올로 만들기 시작하여 20`에 이르면 더 이상 만들지 못하고 그 활동을 중지하게 됩니다. 즉 효모의 능력의 한계점이 바로 알코올 도수 20`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20`이지 그것은 이론상의 수치이고 실제는 이론과 항상 쬐금은 빗나가는 법이니 대략 18`정도에 이르면 효모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정체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알코올 20` 미만의 도수를 가진 술은 다른 균이 섞여 들거나 하면 이내 변질이 됩니다.

술이 시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산균이라는 놈은 항상 호시탐탐 잘 빚어 놓은 술을 망치려 드는 아주 나쁜 놈이지요. 하지만 식초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형세 역전하여 아주 유익한 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은 없는가 봅니다. 항상 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오늘날의 보수나 진보의 잣대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각설하고 이렇게 발효주의 한계를 뛰어 넘게 된 것이 증류법에 의한 술의 제조방법이랍니다. 발효한 술을 소줏고리에 넣고 증류를 하게 되면 일차로 증류되어 나오는 증류주는 대략 35`에서 45`언저리에 이르게 되고 이를 다시 이차 증류하면 대략 70`를 넘기는 독한 술이 완성됩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독주의 도수가 대부분 40에 이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하지만 바카디 같은 증류주는 알코올 도수가 70`에 이르는 술도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발효주는 알코올 도수가 20`를 넘지 못하여 오래 보관하기가 힘들지만 증류한 증류주는 아무리 오래 보관하여도 술이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 숙성되어 맛이 더욱 더 좋아지기 까지 합니다.

어쩌다 만들어진 위스키?

서양에서는 맥아(몰트)로 빚은 발효주를 증류한 것을 위스키라고 하며, 포도주를 증류한 것을 브랜디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술에는 혹독한 세금이 붙게 마련인데 동 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모두 술을 좋아하는데다가 무한정 퍼먹으니 위정자들은 그 술에 세금을 먹여 많은 액수를 손쉽게 거두어들이게 됩니다. 그러니 술을 만드는 이는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하고 위정자들은 세금을 받아내려 하니 자연히 술을 만드는 이들은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술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세리들은 악착 같이 그 술을 찾아내려 합니다. 숨바꼭질이 벌어지게 되는데 영국 깊은 산속에는 오크(참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술을 만든 이들은 그 나무를 베어 술통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세리들에게 발각 당하지 않기 위하여 땅 속이나 잘 발견할 수 없는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는데 자칫 일이 잘못되면 숨겨둔 자신도 잘 찾지 못하는 수가 생기게 되지요. 이리하여 몇 수 십 년이 흐른 후 발견되어 개봉된 술은 술통인 오크목의 진액이 섞여 들어 그윽한 향을 발산하게 되고 색깔도 멋있는 브라운으로 바뀌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이러한 와중에 아주 멋있는 술이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오늘 날의 위스키랍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술들보다 더욱 탁월한 술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증류한 술은 독하기만 하지 발효주보다 그 맛이나 향이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약재나 가향재, 부가재를 섞어 넣어 다양한 맛을 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뒤져 보아도 이렇게 많은 종류의 다양한 술을 만든 민족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에 이른 양조기술은 방방곡곡 명주가 없는 고장이 없었고 집집마다 특징 있는 술이 없는 집이 없었으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자백가시대 백가쟁명의 시대라 하였다면 우리나라 조선시대는 술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요?

만약에 일제시대와 박정희시대 때 이러한 술의 비결들이 그대로 남아 모두 전승되었다면 오늘날 그 술들은 전세계로 수출되어 어마어마한 소득을 가져다 주는 효자상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 말이 허튼 말이 아닌 즉 프랑스의 와인이나 미영의 위스키, 러시아의 보드카, 중국의 마오타이, 우량예 일본의 사케를 살펴보면 우리 나라 술에 비하면 두어 수 처지는 술들이 명주랍시고 행세한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진짜 명주는 따로 있다

어디 한 번 우리 술들을 살펴 볼까요? 우선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진도 홍주를 봅시다. 전남 진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술인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술이 얼마나 독한지 조선 9대 성종임금 때 윤비 폐출이 있었습니다. 윤비를 폐출시키기 위해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성종이 여러 대신들을 궁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허종이라는 대신에게는 지혜로운 부인이 있어 훗날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남편 허종에게 입궐하기 직전 진도 홍주를 먹였습니다. 홍주를 먹은 허종은 궁으로 입궐하다가 사직교 부근에서 술에 취한 채 낙마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허종은 자연스럽게 어전회의에 불참하게 된 것이지요. 그 후 윤비 소생인 연산군이 보위에 올라 윤비 폐출에 가담한 신하들을 모두 잡아죽이는데 다행히 허종은 그 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허종의 5대 손인 허대가 표목동(지금의 고군면)에 내려와 홍주를 빚기 시작하여 허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 술이 지금의 진도 홍주인 것입니다. 홍주는 다른 술과는 달리 그 빛깔이 선명한 홍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증류할 때 똑똑 떨어지는 술 방울을 지초라고 하는 약재 위에 떨어지게 하여 그 색이 우러난 것인데 주로 보리로 빚어서 증류한 술이랍니다. 빛깔만 놓고 보아도 지구상 어디에도 이렇게 선명한 홍색을 띤 술이 있겠습니까? 지초의 약성이 함께 배어있고 보리의 달큼하면서도 구수한 맛과 향이 배어 있는 술, 그러면서도 증류한 술이기에 알코올 도수도 40`에 이르니 피같이 선명한 홍색 술을 한 모금 입에 물면 알싸하게 전해오는 알코올의 자극과 더불어 은은하게 바쳐주는 지초의 향은 세계 유수의 어느 술과 겨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러한 술입니다.

진도의 홍주는 여러 술들과는 만들기 전부터 약간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누룩을 2단 만들기로 하는데 보리쌀을 분쇄하여 2할 정도의 물을 섞어 누룩을 만든 후 다시 보리쌀을 물에 불려 찐 다음, 처음에 만든 누룩을 섞어 누룩을 제성한 후 누룩상자에 넣고 띄웁니다. 7일 정도면 노랗게 누룩이 뜨는데 밑술도 보리를 사용하고 덧술도 역시 보리쌀로 하여, 대략 누룩으로부터 시작한 날이 7일이요, 밑술이 3일 덧술이 6일에 숙성을 12일 정도를 하니 모두 한 달에 걸쳐 술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발효된 술을 소줏고리에 붓고 증류하여 지초에 받아내면, 그 유명한 진도 홍주가 되는 것인데 지금도 전남 진도에 가면 집집마다 홍주를 빚습니다. 또 홍주를 만드는 공장도 몇 군데 되지만 가양주는 그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이 그 전통의 맥을 이었는지, 어느 집 홍주가 가장 맛있고 정통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분들도 진도 땅에 갈 기회가 있거들랑은 그냥 무심히 들러보지 마시고 진도의 그 살아 숨쉬는 소리와 진도의 술 홍주를 꼭 맛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