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 주막집 이야기
지난 번 이야기에서 언급한대로 오늘은 주막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술이라는 게 있게 된 이후부터 주막이 생기는 것은 의외로 당연지사가 아닐까요? 뭐니뭐니해도 술장사가 가장 많이 남는 것은 고금동서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술만 팔아서는 밋밋하니 술과 밥을 함께 팔거나 술과 색을 함께 팔거나(?), 술과 잠자리를 함께 제공하여 그로부터 주막의 분화가 시작되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
과거 주막의 풍경
술과 밥은 처음부터 함께 파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술과 색은 처음에는 함께 팔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국기가 문란해지고 풍습이 어지러워지면서 색주가 같은 집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주막은 원래 술을 팔면 잠은 거저 재워주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잠자리라는 게 이부자리가 쫙 깔려있고 화장실과 침실이 따로 된 현대의 여관이 아니라, 봉놋방이라고 불리는 좁은 방이었습니다.
게다가 장판도 시원찮아 천자문을 연습했던 한지 정도를 덕지덕지 발랐으나 습기 때문에 장판이 일어나서 구들을 바른 황토가 쓸려 가루가 풀풀 날리고 이부자리 대신에 지푸라기로 엮은 거적으로 덮기를 하는 그런 서비스가 형편없는 방이었죠.
장날이거나 과거 날이 임박한 그런 경우 사람이 넘쳐나면 한데 잠을 잘 수 없는지라 땀냄새 가득한 방에 칼잠을 잘 수 밖에 없고 남녀 구별을 두고 방을 내주지 않는지라 여인네들은 방구석에서 앉은 채로 날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이와 벼룩, 각다귀마저 설치면 잠은 아예 물 건너간지 오래고 그저 날만 밝기를 기다릴 뿐인데 누군가가 지붕 내려앉을 정도로 코를 골면 볼 장 다 본 것이지요.
주막의 중심, 주모
주막의 경영은 양반이거나 중인이거나 천민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양반이라 할지라도 바깥 양반이 없거나, 죽어서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여자가 주막을 여는 경우가 있었고, 천민이라도 살림살이를 위해서라면 주막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만 운영방식이 조금은 차이가 났는데 여성이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남성은 주막을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주막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조선시대는 남녀 유별이 특별히 심한지라 서로 상면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므로 양반 여자가 주막을 운영할 때는 주막의 양반주인은 방안에 앉아서 장사를 하되 주객이 방문하여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어 큰 기침을 하면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얀 팔뚝과 함께 술국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주객은 그릇에 술을 받고 마당에 펼쳐놓은 평상자리나 마루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되 안주는 김치나 절인 무, 때로는 생선꺼리, 나물 정도였고 아주 좋은 안주라고 한다면 너비아니 정도였습니다만 안주만큼은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술을 다 마시면 술값은 마시던 그 자리에 두고 가면 되었습니다. 이렇게 양반집 여인네가 장사를 하는 주막을 팔뚝만 쑤욱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하여 “팔뚝집”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오늘날 팔뚝집의 기원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장 익숙하게 드라마에서 보던, 주모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코맹맹이 아양을 있는 대로 다 떨며 개다리 소반에 술을 차려 내어놓는 그런 광경의 주막은 중인이거나 천민들이 운영하는 주막입니다.
이렇게 주막을 운영하는 인적 요소 가운데는 주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며 그 외 구성원으로 규모가 큰 주막일 경우 찬모가 있거나 설거지 담당 아낙과 중노미가 있었습니다.
중노미가 하는 역할은 오늘날 삐끼(?)와 같다고나 할까요? 손님을 유치하는 몫을 담당하며 특히 손님 가운데는 술 한잔에 안주 한 점은 공짜이지만 개중에는 너비아니나 고기안주 같은 좋은 안주가 나오는 날에는 한 점 만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점을 먹는 그런 비양심적인 손님의 행태를 감시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파리채 같은 긴 회초리를 들고선 일변 파리를 잡다가도 응큼한 손이 나타났을 때 즉각 그 손을 내리치곤 하였지요.
하지만 주막에도 비리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중노미와 친해진다면 안주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는 특혜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 이 외에 중노미는 나무도 패주고 마당도 쓸고 하지만 특별한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고 수고비 정도로만 받았다고 하네요. 규모가 큰 주막은 이렇게 몇몇이 운영도 하지만 대개의 마을 주변의 작은 주막은 주모 혼자서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막에서는 항상 술을 빚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술지게미는 넘쳐날 수 밖에 없는데 이 술지게미를 처리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허기가 질 때는 술지게미를 식량 대용으로 쓰기도 하였지만 주막 주변에는 술지게미를 받아다 물을 타서 두면 자연히 술이 짙어지는데 그리 독한 술은 아니지만 술이 미진한 주객에게는 그런대로 마실만하였습니다. 이를 모주라고 하였으며 모주를 즐기는 사람을 모주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술을 담아서 들병에 이고서는 남정네들에게 파는 여자들을 “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들병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여 항상 돈에 쪼들리는 경우가 많아 때로는 은근히 손목을 잡는 남정네를 따라가고는 하였는데 그로 인한 대가로 입에 풀칠을 하기도 하였으니 하층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가 그지 없었답니다.
주막, 단순한 술집을 넘어
주막은 그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 획득의 장소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요즘과 같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수단도 없고 뉴스를 들을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보획득과 뉴스를 얻기에는 주막만큼 적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술 뿐만 아니라 소식도 넘쳐났던 그 곳, 주막. 주막에서는 항상 생생한 정보와 뉴스거리가 넘쳐났고 술꾼들이 왁자하니 떠들거나 은밀히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주모는 자연히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되거나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반드시 주막을 찾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배뱅이 굿에서도 보면 배뱅이네 사정을 알게 된 사기꾼들이 그 정보를 획득한 곳도 주막의 주모였으며 춘향전의 이도령이 민심을 얻어 듣는 곳도 역시 주막이었습니다. 옛 소설의 모든 무대에서 주막이 빠져서는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을 정도 입니다. 그러니 주막의 위치도 교통의 요지이거나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반도의 길목을 지키던 주막
주막의 위치를 살펴보면 주막은 대개 커다란 고개를 넘기 전이거나, 큰 강을 건너기 전, 그리고 삼거리나 사거리 등 커다란 분기점이 있는 곳과 장터, 공사판에 주로 위치하였습니다.
그 흔적으로 경상도 문경에서 새재(조령)를 넘기 전 대단히 번성했던 곳에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하며, 예천 삼강나루에는 지금도 주막이 남아서 관광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주막은 한 곳이 있기도 하지만 주막이 연이어 여럿 있는 곳도 있었는데 주막이 여럿이 모여 있는 곳을 주막거리라 하였습니다.
또한 천안 삼거리에는 경기와 경상, 호남으로 갈라지는 커다란 분기점으로 역시 주막이 번성한 장소입니다.
능수버들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조선 초기 수자리를 살러 가게 된 홀아비 류봉서가 어린 딸 능소와 이별하면서 꼭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하면서 버들가지를 꺾어 심었던 것이 자라나서 커다란 나무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능수버들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호남의 곡창지대의 곡물과 수산물을 운반하여 최종 집결지가 되는 벌교나 줄포, 만경강을 거슬러 전주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장터가 들어선 자리에는 어김없이 주막거리가 들어섰습니다. 또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들을 위한 주막이 장터 언저리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한양에서는 제물포까지의 거리가 딱 하룻길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물건을 챙기고 아침을 먹은 다음 걸으면 점심 무렵에 지금의 오류동에 도착하는데 오류동에는 주막거리가 있었습니다. 오류동이란 이름도 주막의 주변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있었으므로 오류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랍니다.
이곳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또 다시 길을 걸으면 저녁 무렵 제물포에 도착하게 되고 가지고 간 물건을 모두 팔고 제물포 주막에서 하루 잠을 자고 다시 되짚어 오면 오류동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저녁 나절 한양 땅 성문 안으로 들게 되니 지금도 서울과 인천간의 옛날 길은 지명이 재미있고 의미 있는 곳이 많습니다.
다음에는 인천 능허대와 사모지고개에 어린 전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