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배우는 협상의 법칙 – 실리는 챙기되 명분은 주어라

실리는 챙기되 명분은 주어라

영화 ‘007 퀸텀 오브 솔러스’ 에서 배우는 협상의 법칙 – 실리는 챙기되 상대에게 명분은 주어라

태양이 작열하는 남미의 휴양지 아이티의 해변 선착장을 나란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삼엄한 경비에 둘러쌓인 이들은 볼리비아를 군사쿠데타로 재집권하려는 야욕에 불타는 망명 독재자 메드라노 장군과 그의 쿠데타를 도와 주는 대신 볼리비아의 수자원사업을 장악하려는 퀀텀 펀드의 도미닉 그린 회장입니다. 이제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볼까요? C-:

007, 퀸텀 오브 솔러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막대한 자금과 막강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동원한 치밀하고도 빈틈없는 쿠데타 계획과 앞으로 일주일 후면 볼리비아를
재집권하도록 차질 없는 진행상황을 들려주는 도미닉 그린 회장. 그제서야 메드라노 장군은 흡족해 한다.

메드라노 장군 : 꽤 바빴겠군. 그럼 대가로 뭘 원하나?

도미닉 그린 회장 : 사막입니다.

메드라노 장군 : (의외인 듯) 사막?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곳이야.

도미닉 그린 회장 : 그러니까 장군님께서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운수대통 거래죠.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도미닉 그린 회장의 협상 마무리 전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리는 챙기되 상대에게 명분은 주어라( Make your gain much smaller and less attractive than the gain and profit of the other side from the deal )’인데요.

누구나 남는 장사를 하고 싶어하며, 밑지는 거래는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기업이 돈 안 되는 협상을 하는 직원을 내버려 두겠습니까? 하물며 기업의 영속성마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중요한 협상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요.

필자도 얼마 전 거대 다국적 기업이 국내 기업을 상대로 막대한 손해보상을 요구함에 따라, 기존의 거래관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배상금액은 최소화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고 협상전략을 수립하고 직접 협상과정에 참여하는 전면적 협상컨설팅을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협상 결과, 당초 요구한 배상금액의 1/4선에서 합의를 유도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상당한 국제협상을 경험한 필자지만, 동 협상을 진행하면서 미국 및 유럽 비즈니스맨들이 극도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 체면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우리 나라사람들 같으면 낯 간지러워서라도 양보하고 넘어갈 만한 상황에서도 거의 억지에 가까운 떼를 쓰며 막무가내로 압박해 올 땐, 과연 이 사람들이 선진국 국민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매번 협상 라운드마다 조금씩 양보를 해가면서 관계개선 및 협상을 원만히 진행하는 ‘한국식 퍼주기’ 협상 스타일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습니다.

 

협상과정

한국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해외의 협상과정

막판에 가선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선처를 읍소하게 만드는 이들의 전형적인 고강도 압박전략이 한국인들에게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즈니스맨이든 외교관이든 정작 협상에 참여한 실무자들은 사실상 결정권을 갖고 있지않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한다면 왜 그들이 그토록 살벌한 협상을 구사하는지 이해가 갈 뿐 아니라, 그들과의 협상을 어떻게 준비하고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접근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즉, 대부분의 협상은 일정 부분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즉 한정된 범주에서 잠정적인 합의만 도출 할 수 있는 대리인들간의 협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협상은 어떤 최종결정을 합의한다기 보다는 실질적으로는 상대가 우리측 상황이나 제안에 대해 수긍할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상대는 돌아가 자신의 상사나 최종결정권자에게 우리측의 상황과 제안을 마치 최상의 조건처럼 전달 및 보고하게 됩니다. 또한 과욕을 부리다간 자칫 이마저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어지간하면 우리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상사를 설득하게 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자신의 상사 혹은 최종결정권자에게 우리의 입장과 이익을 옹호하는 내부협상을 펼치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인 것이죠.

 

협상의 기술, 만년필

협상은 결국, 최종결정권자에게 우리의 입장과 이익을 옹호하는 내부협상을 펼칟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협상은 상대에게 자신이 투자하고 양보한 것 보다 더 많은 실익과 심리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당신은 고작해야 본전이나 건질까 하는 보잘것없는 결과 밖에 얻지 못했지만, 상대는 실로 결코 놓칠 수 없는 상당한 이득을 보는 거래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미 흡족할 만한 결과에 내심 즐거워하고 있는데, 상대가 뜻하지 않은 추가 선물(sweetener)까지 덤으로 챙겨 준다면, 상대는 자신의 결정권자를 설득하기가 한결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더구나 그 추가선물이 결정권자 개인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 즉, 단순한 물질적 만족을 넘어서 체면유지, 평판개선 등 심리적으로도 높은 만족도를 부여하는 애착이 가는 선물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합의유도 전술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상대에게 매력적인 실익과 우리와 합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내부협상에서 필요한 확실한 명분’인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안겨줘야 합니다. 상대에게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나 양보에 비교해 나 자신이 얻게 될 이익이 더 크면 더 클수록 거래는 매력적으로 비춰집니다.

더욱이 상대가 제시한 논리나 증거가 나의 상사나 최종 결정권자에게 그대로 들려줘도 논리적으로 수긍이 가고 합의결과도 일정수준 이상으로 만족할 만하며, 동시에 나에 대한 업무성과나 역량평가도 긍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이라면 왜 인용치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이 모든 예상 밖의 성과가 상대 상사의 치적으로 승화되기까지 한다면 실로 금상첨화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요. 이 모든 협상 전략전술이 바로 상대에 대한 다각적이고 체계적인 정밀분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협상 시나리오에 따른 연출이란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협상, 기술, 친구

협상은 상대에 대한 치밀한 분석에서 시작됩니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외교를 성사시키는 등, 20세기 미국 외교협상의 대표라 불리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어느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을 되새겨 봅시다. 그때 사회자가 “키신저 국무장관님, 미국 정부가 외교협상에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제대로 모른 채 협상 테이블에 나가기도 합니까?”라는 질문에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고 명쾌하게 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 채 협상에 뛰어 드는 순간 망하는 겁니다.”

필자는 국내 대표 자동차기업의 해외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 협상 컨설팅 및 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 회사는 이탈리아 시장에서의 판매가 부진하여 속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컨설팅 과정에서 원인을 분석해보니, 오래된 현지 이탈리아 딜러의 협상수완이 매우 뛰어나, 우리측 사람들이 매번 협상에서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해서 필자는 이탈리아 실제 협상상황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글로벌 비즈니스 협상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2002년 1만 3천대에서 2003년 2만 2천대, 2005년에는 4만 4천대로 현지판매가 급신장했습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매년 1억 5천만 달러씩 총 6억 달러 이상의 추가 수출실적을 올린 셈입니다. 필자에게 지급한 컨설팅 비용의 6천 배 이상의 막대한 투자효과를 올린 셈입다. 또한, 쟁쟁한 일본 자동차, 텃세 심한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의 견제가 극심한 가운데서 이룬 놀라운 판매신장이야 말로 제대로 된 글로벌 비즈니스 협상역량이 가져다 주는 성공적인 실증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낸시 애들러(Nancy Adler)는 1992년 ‘기업의 전략은 빠르게 글로벌화되어 가고 있으나 개개의 임원과 매니저는 기업의 글로벌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사람부터 글로벌화 시켜야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16년이 지난 오늘날 애들러의 메시지는 우리나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