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 당 태종과 ‘세 개의 거울’

중국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누린 왕조가 언제인지 물으면 대부분이 당(唐) 왕조라고 대답합니다. 국경을 넘어온 외국 사신들이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당나라는 사신들뿐만 아니라 그 수행원, 그들이 타고 온 말 먹이 등 모든 비용을 부담했을 정도로 국력이 막강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외국 사신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당나라가 이 같은 전성기를 누린 것은 훌륭한 통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당 태종(太宗)의 역할과 영향은 대단히 컸습니다. 이 때문에 태종은 늘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그를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가 누구보다 충고와 직언을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최고 명군 당 태종의 ‘삼감(三鑑)’

직언과 충고, 특히 아랫사람의 직언과 충고는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인성(人性)의 약점 때문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직언을 잘 수용했다는 태종도 인간인지라 직언과 충언을 마냥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위징(魏徵)이 조정 회의에서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태종의 체면이 구겨질 정도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후궁으로 물러나온 태종은 장손(長孫) 황후에게 씩씩거리며 “이 늙은이를 죽여버려야지 안 되겠소!”라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장손 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고, 태종은 조정 회의에서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장손 황후는 침소가 들어가 관례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태종에게 큰절을 올리며 축하를 드렸습니다. 태종이 영문을 몰라 하자 황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는 성군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바른 말을 서슴지 않는 신하를 두셨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태종은 마음을 풀었습니다. 얼마 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너무 슬퍼 5일 동안 조회를 파하며 위징을 추모했습니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 “오늘 내가 거울 하나를 잃었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신하들이 무슨 거울이냐고 묻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태종의 ‘삼감’입니다. 태종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로잡아 주는 위징을 거울에 비유하며 충신의 직언과 충언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나는 말랐지만 천하가 살찌지 않았는가

태종보다 조금 뒤의 인물이며,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잘 알려진 현종(玄宗) 역시 명군의 반열에 듭니다. 태종이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전성기를 구가했다면, 현종은 ‘개원지치(開元之治)’라는 또 다른 전성기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개원지치’라는 전성기를 이끌 당시 현종이 어떤 군주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현종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집권 이후 정권의 안정과 백성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특히 강직한 인재들을 재상에 기용했는데 특히 한휴(韓休)라는 재상은 ‘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서에는 그를 ‘나라 일에 관계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직언하고 충고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휴는 ‘재상이 되어서는 천하의 크고 작은 일들을 다 챙겨서 처리’했고 현종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지체없이 글을 올려 충고했는데, 이 때문에 현종은 별 말은 없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현종의 이런 심기를 눈치 챈 소인배들은 한휴를 제거하기 위해 현종을 찾아가 이러쿵 저러쿵 헐뜯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종은 자신의 비위만 맞추려는 신하들에게 놀아난다면 국정을 돌볼 수 없어 편히 잠잘 수 없지만, 바른 말을 하는 한휴같은 신하와 일을 한다면 천하를 생각하더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휴를 믿는 것이 사직을 위한 옳은 길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종은 집권 후반기로 오면서 판단력을 잃어갑니다. 양귀비와의 향락도 한 몫을 했습니다. 안록산(安祿山)이란 화근을 끌어들입니다. 한번은 불룩 나온 안록산의 배를 보고 현종이 그 배속에는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나왔냐고 묻자 안록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이 가득 차 있을 따름입니다!”

현종은 기분이 좋아 안록산을 나라의 대들보라 칭찬했고, 안록산은 얼마 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당나라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무엇이 현종을 이렇게 변질시켰을까요?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 이롭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허심탄회한 충고와 이를 흔쾌히 수용하는 조직이라면 반드시 성공을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다면 기업 전체가 활기를 띠고 올바른 길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이 우리 조직 문화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하는 직언과 이의 수용이란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기회가 되길 희망합니다.

 


김영수 역사학자

지난 31년 동안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절대 역사서 <史記>를 공부하고 있는 필자는 지금까지 중국과 중국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국 전역의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150차례 이상 탐방했고, 그 대장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인문학적 차원에서 저자는 사마천과 <사기>의 인문정신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기업인들을 대상으로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감과 착한 기업인 정신을 <사기>에 등장하는 역사 속 다양한 인물들의 사례를 연계시켜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30여 년에 걸친 연구와 그 결과는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저역서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인 저역서로는 <첩자고諜者考>, <간서間書>,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2권),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사기를 읽다>, <완역 사기>(현재 3권 출간), <제국의 빛과 그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