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지난 후

팬데믹 이후의 세상을 예측하는 기사와 보고서가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팬데믹 이후에 세계 최고의 갑부들이 타는 슈퍼요트의 디자인은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예측하는 기사까지 나오는 세상이다. (슈퍼요트는 ‘바다 위의 놀이시설’에서 ‘부자들을 위한 안전한 요새’로 그 개념이 바뀔 거라는 게 그 전망이다.) 이제까지 나온 예측들을 몇 줄로 요약해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대면접촉을 꺼리고 언택트(untact)를 추구하면서 원격근무가 증가하고, 그 동안 유행어가 된 ‘공유경제’는 어쩌면 끝났을 수도 있고, 그 대신 로봇의 도입과 디지털화가 가속화될 것이고, 그 결과로 승자독식으로 큰 기업만 살아남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일자리는 더 줄어들면서 양극화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상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확산(되지만 결국 도입은 안)될 것이고, 정부와 기업에 의한 프라이버시 침해와 감시는 증가할 것이고, 정부의 역할은 커질 것이고,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세계화는 종말을 고할 것이고, 리쇼어링(reshoring)이 인기를 끌면서 국제적 협력은 감소하겠지만, 위기의 공동대응을 위해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

위의 내용 정도면 ‘포스트 팬데믹’ 보고서들의 대부분은 커버했다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세상이 정말로 이렇게 변할까? 적어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극적으로 눈앞에 펼쳐질까에 대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대부분 사회변화는 그 시기를 통과한 후에야 그 실체를 뚜렷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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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의 성 혁명

우리가 즐겨 하는 세대별 구분에서 ‘Z세대(Gen Z)’는 가장 어린 세대로, 이제 대학에 막 입학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현재 십대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은 많은 기업들의 연구대상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들이 베이비부머, X세대, 밀레니얼 세대와 비교했을 때 가장 진보적인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세대라고 알려져 있다. 성 소수자를 포함한 성평등 이슈에 가장 민감하고, 인종평등에 가장 앞서 있는 반면, 발언의 자유나 성 문제에 대한 태도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왜 성 문제에 이전 세대보다 보수적일까? 사람들은 Z세대가 X세대의 자녀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X세대는 어린 시절에 매체를 통해서 HIV 에이즈의 확산을 지켜봤고,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주 일찍 깨달은 세대다. Z세대는 그런 X세대에게서 자란 세대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 베이비부머들(1946-64년 생)은 자라면서 1960-70년대의 성혁명(sexual revolution)을 경험한 세대이다.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 경험이 자녀 교육에 영향을 주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로운 성관계를 옹호한 미국의 성 혁명은 1960년 미국에서 시판 허용된 경구피임약으로 촉발되었고, 1980년대 HIV 에이즈 집단감염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미국 사회에서는 콘돔을 사용한 안전한 섹스에 대한 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덕분에 십대 임신율은 물론 십대 사이의 성관계도 급격히 줄어드는 소위 ‘성의 보수화’ 현상이 나타났다. 안전하지 않은 무분별한 성관계가 줄어든 것을 ‘보수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SARS-CoV-2라는 공식명칭을 가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팬데믹을 경고했다. 현재 인류사회의 진행방향, 즉 브레이크 없는 자연파괴와 가속화된 세계화는 팬데믹을 향한 직선도로라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1960년대에 시작된 미국의 성 혁명과 같은, 인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그리고 두 흐름 모두 바이러스에 의해 급정거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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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파티는 끝났다

팬데믹 이후에 관한 예측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글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락다운이 남길 90% 경제(The 90% economy that lockdowns will leave behind)’라는 기사다. 저자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 나라들 조차도 궁극적으로 GDP의 10%가 감소한 90% 경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세계적인 대공황에 대한 전망이 나오는 와중에 90%를 유지한다면 준수한 성적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90%의 경제는 단순히 양적인 감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학계의 전문가들 중에는 변화무쌍한 RNA 바이러스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완벽한 백신은 나오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코로나19는 근절되거나 완전히 예방되는 질병이 아니라 HIV 바이러스처럼 항상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이고, 우리는 언제든지 그 병에 걸릴 각오를 하며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새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은 퇴근 후 술자리에 마음 놓고 가지 못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망설이게 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일,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어울리는 일은 마치 처음 만난 사람과의 하룻밤처럼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이전의 세상과 형태상으로는 90% 정도 닮아있지만 2020년 이전까지 우리가 누렸던 자유로움은 빠진 세상이 될 것이다. 자유로운 접촉이 망설여지는 세상에서 모험은 줄어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투자자를 구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성장도 더디게 될 것이고, 덜 재미있고, 덜 짜릿한 세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온 짜릿했던 세계화와 글로벌 투기자본은 위워크와 우버처럼 순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에 돈을 몰아주며 전통적인 산업들을 무너뜨렸고 시장을 교란했던 것도 사실이다. 뭄바이 같은 도시에 ‘맥시멈 시티(Maximum City)’라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찔하고 위험천만한 성장을 이끌었던 세계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인지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은 이제 희미하게나마 답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세계가 하루아침에 다른 모습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똑같은 일상이 진행되겠지만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차분하고, 조금 더 조심스러운 세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실망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서 아직도 요란스런 파티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우리 모두는 이 변화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동의하게 될지 모른다. 팬데믹이 지난 후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 우리는 조금 더 보수적인 생활을 하면서 ‘와일드했던’ 2010년대를 회고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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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 미디어 디렉터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고, 현재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