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전통주가 아니다? 선조들이 들려주는 우리 술 이야기

막걸리 그리고 전통주, 옛 선조들이 들려주는 우리 술 이야기

막걸리를 흔히 우리나라의 전통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진짜 전통주는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술의 맛 만큼이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술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술이란 게 있게 된 걸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술 역사나 함유된 이야기는 세계의 술만큼이나 오래되고 재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인 제왕운기에 인용되어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백에게는 세 딸 유화, 선화, 위화가 있었는데 더위를 피해

지금의 압록강인 청하의 웅심연이란 곳으로 놀러

와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 뒤 해모수가 신하의 조언을 들어

새로 웅장한 궁궐을 짓고 세 처녀를 초청하였다.

초청에 응한 세 처녀에게 해모수는 맛있는 술을 대접하였고

만취한 세 처녀는 이윽고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세 처녀에게 연모의 정을 하소연한다.

세 처녀는 부끄러워 달아나려 하였지만 유화아가씨가 해모수에게 붙들려

궁전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만 해모수와 정이 들고 말았다.

어찌 어찌하여 유화는 아이를 갖게 되고 이를 낳으니

그가 훗날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이었다.

 

 

몇 달 전 고구려 유적을 여행하면서 동행한 고대 민족학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 노희상 교수님에게 술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며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무척 재미있어 하더군요.

이렇게 까마득한 신화 시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술의 역사도 세계 유수의 나라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제사나 추수 같은 여러 행사가 있을 때면 의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었다고 하니 술 좋아하는 습성은 조상님이나 현재의 우리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술 빚는 솜씨도 대단히 탁월하였던지 중국인들 사이에는 고구려를 ‘自喜善藏釀’(스스로 술 빚기를 잘하였다)하는 나라라 불렀고, 신라 때에는 멀리 당나라의 행세 깨나 하는 식자들 층에서는 신라주를 마시는 게 요즘 루이비통 가방 하나 걸치는 것처럼 유행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네들 입장에서는 신라주가 양주(?)에 속하는 모양이었던지 무척 귀하고 비싼 술이 애써 새벽 찬바람에 깰까 봐 걱정했다는 당대 유명한 시인 이상은의 글도 남아 있답니다.

백제의 술도 탁월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백제사람 인번(수수보리)은 발효주 빚는 방법을 일본에 전하여 주어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술의 신으로 떠받들어 지고 있습니다.의 중권 응신천황조 편을 살펴 보면 베 짜는 기술자인 궁월군의 증손인 수수보리란 기술자가 일본으로 와서 술을 빚어 응신천황에게 바쳤더니 왕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노래를 불렀다고 전합니다.

 

증류주, 세상에 나타나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접어 들면서 술의 세계에서는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됩니다. 고려 중엽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모래 속에 있는 반짝이는 물건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이라는 술법이 연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발상은 인간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는 전초가 됩니다. 부지런히 방법을 찾는 와중에 여러 가지 화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죠. 하기사 근대 의학이나 여러 학문도 모두 이런 터무니 없는 인간의 욕구가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경우가 허다했듯이 아라비아 사람들은 술을 끓이는 실험을 반복하다 드디어 증류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각종 액체의 끓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러한 발견은 오늘날 석유화학의 근간이 된 것을 감안한다면 GS칼텍스라는 회사의 운명도 이 때부터 잉태되었다고 주장하면 너무 지나친 것인가요? ^^

 

아무튼 이러한 증류 방법은 아라비아를 침공한 징기스칸에 의해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아라비아의 술이어서 아랑주, 아락주 등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징기스칸의 원나라는 고려시대 때 수 차례에 걸친 원정과 함께 우리나라에도 증류주의 방법을 전달하고야 맙니다. 그 당시 원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마을 근처에는 증류주가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고 지금도 개성과 안동 같은 지방에 소주가 유명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몽골군에 의해 전해진 증류주의 기법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만들어지던 발효주는 알코올 도수가 18`를 넘기가 힘들었습니다. 자연적인 알코올 제조는 효모에 의해서 당분이 알코올로 변환되는데 알코올 도수가 18`를 넘으면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효모가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거든요. 따라서 발효 양조법으로 만든 술은 결코 18`(이론상으로는 20`)를 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20`를 넘지 못하는 술은 오랜 기간 보관을 할 수가 없답니다. 대략 상온에서 열흘 정도면 변질되어 식초로 변하고 만답니다. 이러니 아무리 맛있는 술을 만든다 해도 상하기 쉬워 먼 고장으로 보낸다든가. 두고 두고 먹는다는 게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증류법은 발효 술을 끓여 알코올을 증발(알코올의 끓는 점은 78`C)시켜 다시 응축하여 받으니 그 도수가 20`를 훨씬 넘게 되어 아무리 오래 놓아 두어도 결코 변질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 조금만 마셔도 취하고 맑고 투명하여 이슬 같다 하여 지금도 증류주를 이슬 로(露)자를 써서 露酒라고도 하고 땀 방울처럼 맺힌다고 하여 땀 방울 한(汗)을 써서 汗酒라고도 한답니다.

고려 말에 이 땅에 자리잡은 새로운 주조법은 인간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상류층의 방탕은 더욱 더 심해졌고 아까운 곡식들을 몇 방울의 술로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 식량이 부족한 하층민들의 기아를 부추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 초에는 여러 차례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들 만은 아니었습니다. 집집 마다 달리하는 독특한 술 덕분에 그 제조법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더하는 약재에 따라 약효가 있거나 첨가하는 향재에 따라 그 향과 빛깔과 맛, 효능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선 시대 집집마다 담는 술이 다 달랐다고 했을까요? 또한 유교의 제사 풍습에 따라 가문의 비전으로 술 빚는 방법이 전래되고 그러한 방법은 지금도 많은 문서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답니다.

하나의 예로와에는 음식과 술의 관계에 대하여 “밥 먹기는 봄 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 같이 하며, 장 먹기는 가을 같이 하되, 술 먹기는 겨울 같이 하라”고 하였으니 그러한 음식의 특색을 말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조선시대로 와서는 빚어지는 술의 종류가 무척 많아져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 각 지방의 이름난 술을 꼽아보면 서울의 약산춘, 전라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평양의 벽향주, 금천의 청명주 등 이름만 들어도 가히 그 술의 맛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만치 우아하게 들립니다. 최남선 같은 이는 조선의 3대 명주를 꼽기를 평양의 감홍로와 전주의 이강고, 정읍의 죽력고를 꼽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술, 흔적으로 사라지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화려하게 일어났던 우리 술의 역사가 호된 시련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제국주의 시대로 변신하는 과정 속에서 비운의 대한제국이 종말을 고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제는 1907년 7월에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주세령을 공포하게 됩니다. 즉 술을 마음대로 빚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같은 해 8월에는 주세령 시행규칙을 공포하여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은 술을 빚지 못하게 하고 주류 단속을 시행하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는 집에서 담그는 술 제조는 완전히 사라지고 주조업이라는 게 생겨났습니다. 자가 제주는 사라지고 양조장 제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면면히 내려오던 가양주의 수 많은 비법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술을 빚는 방법들이 책으로 문서로 전하여 오기는 하지만, 술이라는 게 책에 적혀진 방법대로 하면 모든 게 다 되는 형태는 절대 아닌 것이지요. 문서로 남길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법들이 사라져 그야말로 가치 있는 우리들의 문화 유산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해방 후 제 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1965년부터 양곡관리법에 의해 그나마 쌀로 빚던 술도 금지되고 고구마나 옥수수로 술을 빚게 되었으며 1도 1양조장 원칙으로 남아, 있는 술이란 게 고작 막걸리, 소주, 맥주 만이 남아서 사람들은 이런 술 가운데에서 선택해야 하는 술 청맹과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좋은 술을 마시고 싶다면 흔히 말하는 양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외국 여행이라도 다녀올라치면 의례히 가방 속에는 양주 몇 병이 담겨 있고 선물이라도 하려면 양주를 선택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술은 모든 음식의 백미요 정화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류의 부흥으로 인하여 한식문화도 새롭게 알려지고 있는 마당에 외국 손님들을 모셔다 놓고 잘 차려진 한식 밥상 앞에서 위스키나 브랜디를 들이대면서 설마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자랑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이런 모양새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마치 몸집은 거대하고 화려한데 머리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특히나 요즘 막걸리를 마치 우리나라 전통 술인 양 자랑하고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데, 막걸리는 우리 전통 발효주인 모래미 술에 물을 탄 것으로 대단히 팍팍하고 맛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맛도 없으니 옛날에는 사카린을 요즘에는 아스파탐이라는 인공 감미료를 타서 달달하게 만들어 내어 놓습니다. 아스파탐은 인체에 해로운 물질로서 어느 나라 술에서도 아스파탐을 넣는 법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이러한 술을 가짜 술이라고 합니다. 진짜 우리네 술은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4~50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담던 밀주를 기억하고 우리 술의 단초를 찾으려고 하지만, 옛날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 가문에서 격조 높은 선비들이 즐기던 술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막걸리가 보졸레 누보를 누른 것이 무엇이 자랑스럽습니까? 보졸레 누보는 생맥주와 같은 개념인 생와인으로서 그리 좋은 술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술을 막걸리가 눌렀다고(?) 그렇게 법석을 떨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대다수가 우리나라 전통주를 알지 못하고 지금도 프랑스의 브랜디와 미국의 위스키, 러시아의 보드카, 일본의 사케, 그리고 중국의 10대 명주 운운하며 엄청난 국부를 해외로 퍼내는 그런 입장에 있으면서도 아무도 우리 전통주에는 관심조차도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옛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술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흥미로운 역사 속 우리 술 이야기부터 일제강점기와 제 5공화국을 거치며 사라져간 우리 술 이야기까지… 흘러버린 시간 속에 우리 술은 그 정체성과 다양성을 잃게 되었고 선조들의 문화의 풍습을 이어가는 것 역시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술에 대한 자부심을 가득 느끼고서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