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시리즈8_창의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직장인의 뒷모습

창의적인 삶은 무엇일까? 창의성 시리즈 8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을 뜻하는 역사(歷史). 얼핏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창의성은 거리가 느껴집니다. 역사라는 학문을 연구하며 저절로 알거나 배워서 알기 보다는 겪어서 알아가며 창의성을 발견한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자존감의 도피처를 찾은 못난 어린이

달력을 넘겨보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무엇보다 골목의 또래들 놀이에 잘 끼지 못하던 생각이 납니다. 운동신경이 유별나게 무뎌서 잘 붙여주지 않았고, 선수가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끼워줄 때도 ‘깍두기’노릇으로 우리 편 미움을 받을 까봐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물론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책 읽기에 몰두했던 것도 지금 돌아보면 그 열등감을 견뎌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뜻이 있었습니다.

본격적 책읽기로 제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여섯 권으로 된 학원사 판 「세계대백과사전」으로 기억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긴 강 열 개가 뭐 뭔지 알아?”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 열 개가 어디 어딘지 알아?” 식으로 내 자존감의 빈약한 도피처를 마련했던 것이었습니다.

 환갑을 넘긴 이제 돌아보니 제 살아온 방식이 어렸을 때 또래들 놀이에 잘 어울리지 못하던 데서 결정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 많은 데를 피하고 혼자 틀어박혀 일하기 좋아하는습성. 과학자가 되려던 어릴 적의 꿈을 접고 물리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교수의 길을 걸은 것도 그 습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습성이 너무 지독해서 교수직마저 그만두고 집에서 혼자 일하기 시작한 것이 나이 마흔 때의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만큼 간섭 없이 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직업이 어디 있을까요? 사회성 부족이 병적 수준이 아닌가, 두고두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소의 행복감

혼자 일하려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동료들, 제자들과의 대화도 (전에는 귀찮았지만) 막상 전혀 없이 지내려니 아쉬울 때가 많았고, 도서관 이용도 어려워졌습니다. 안정된 수입 없이 검소한 생계나마 유지하기 위해 돈벌 이에 신경 쓰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이 ‘성취감’이었습니다. 교수로 그냥 있었다면 연구업적 꾸준히 내면서 내 전공분야의 ‘권위자’로 자리를 굳혀 나갔을 텐데, 혼자 내 좋아하는 공부만 하면서 지내려니 그 공부로 무엇을 성취했는지 확인할 ‘좌표계’가 없었습니다.

칼럼 쓰기와 번역은 생계를 위한 날품팔이의 의미를 크게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이루리라는 목표도 전망도 없는 채로 십여 년간 마음 끌리는 대로 공부를 쌓다 보니 이런 책 하나는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써낸 것이 5년 전에 나온 ‘밖에서 본 한국사’.

 전공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넓게 공부하는 제 방식이 빚어낸 첫 결실이었습니다. 그 책이 나름의 가치를 드러내자 내 공부 방식을 활용할 일거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두어 권씩 빵빵한 책을 써내면서 매우 생산성 높은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3년에 걸친 ‘해방일기’ 작업을 절반 넘긴 상태에서 요 다음에는 어떤 작업을 할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주체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번역으로 버티고 지내던 5년 전과 격세지감이 들더군요.

근년에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 불난 집 구경하며 아빠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우린 참 행복하지 않냐, 불날 집이 없으니.” 하는 짝일지 모르지만, 적게 벌면서도 돈 걱정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내 존재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작업에 조언을 얻기 위해 얼마 전 한국현대사를 전공하는 후배하나를 찾아갔습니다. 학계에 대해서나 학교에 대해서나 역할을 잘 맡고 있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제 작업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나를 부럽다고 말합니다. “형님 하는 것처럼 창의적인 작업이 진짜 학문의 본령 아닙니까?”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적어도 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그렇습니다. 저는 학문의 ‘문(問)’ 자를 중시합니다. 학문을 ‘문제 풀기(problem-solving)’로 여기는 것은 일종의 서비스업일 뿐이고, ‘문제 찾기(problem-raising)’가 진정한 학문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업적을 평가하고 보상해주는 시스템 밖에서 활동해 온 덕분에 오늘날 제 일에서 이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나도 따라 걸었다면 그 동안 보낸 세월은 더 편했겠지만, 그 대신 남들이 잘 못하는 일을 내 식으로 할 수 있다는 지금의 만족감은 없었을 것입니다.

공짜는 없나 봅니다.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 부러워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치기, 팽이 돌리기, 딱지치기, 하다못해 뜀박질에서 싸움까지. 종목마다 서열이 있었습니다. 그 서열의 아래쪽에도 끼지 못해 혼자 딴 짓 하고 놀던 버릇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일까요?

앎의 길을 구분해서 ‘저절로 아는 것(生而知之)’과 ‘배워서 아는 것(學而知之)’, ‘겪어서아는 것(苦而知之)’을 이야기합니다. 창의적인 삶의 길을 저절로 알거나 배워서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보통사람들은 희생할 것 희생하며 겪어야 익히게 되는 길입니다. 그런대로 보람은 느끼지만, 체질 안 맞는 이들에겐 권할 길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