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쇼맨’, 초심에 관한 지상 최대의 쇼

이럴 때 있으시죠?

연애가 길어질 때, 우리는 ‘초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연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에는 종종 심장을 간질이는 설렘과 흉곽이 터질 듯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호흡조절이 잘 안될 정도였죠.

살짝 공중부양을 한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고, 세상은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머릿속에서 ‘희생’이나 ‘무리’라는 단어는 이미 희미해져 버렸기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대책 없이 뭐든 저질렀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성숙한 커플에게도 한 번쯤 위기는 찾아옵니다.

GS칼텍스 사보, 초심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사가 조금씩 사라지면서 그 연인은 마치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거울처럼 익숙해져 버리고, 연인과의 만남은 평일 아침의 출근처럼 일상이 되어 버린 거죠. 예전과 달리 연인에게 짜증을 내고, 심한 말을 하고, 괜히 심통을 부리고, 내 걸 챙기려 하는 것을 우리는 ‘권태’라고 부릅니다.

직장 생활이 길어질 때도, 우리는 ‘초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들 중 대부분은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 비교 당해왔고, 경쟁하며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잠 못 자고 땀 흘렸던 시간이 결실을 맺어 원하던 직장에 입사를 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형용하기 어렵죠. 어느 때보다 나를 사랑하게 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함께 미래는 눈부시도록 파란 불로 인생길을 밝혀주는 듯 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감격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학교를 벗어나 비로소 이 사회의 쓸만한 구성원이 된 것 같은 소속감과 애사심도 있었습니다.

GS칼텍스 사보, 초심

하지만 어떤 모범적인 직장인에게도 한 번쯤 위기는 찾아옵니다.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은 ‘번 아웃 증후군’으로 의심되기도 합니다만, 무기력이 더 잦은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일에 대한 열정을 잃고 안주하려는 경향을 우리는 ‘매너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영화는 이렇게 초심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뤄왔습니다. 누구라도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한 번쯤 겪게 되는 보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 처음처럼,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출근하기는 어렵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앞세운 장르영화는 대개 ‘처음’의 설렘을 충실히 보여준 후, 변해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묘사합니다. 사소한 일로 벌어지는 연인간의 말다툼이나 긴장감이 사라진 직장에서의 크고 작은 사고 같은 것들이죠. 무엇보다 권태와 매너리즘은 인물을 잘못된 욕망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리고 초심을 떠올리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를 절정부에 배치한 후, 이야기를 맺게 됩니다. 여기,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위대한 쇼맨, 바넘의 이야기

“믿지 말아요. 당신은 부끄러운 존재라는 사람들 말을. 세상이 두렵다고 숨어서만 살았죠…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펼쳐요. 이제 삶의 무대에 눈부신 조명을 켜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봐요. 이 넓은 세상엔 놀라움이 가득하죠. 멋진 환상으로 당신의 삶을 채워 봐요. 눈앞에서 꿈이 이뤄지고 있어요. 날개를 펼쳐요.”

<위대한 쇼맨>(마이클 그레이시, 2017)은 작년 12월 20일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입니다. 국내에서 음악 영화나 뮤지컬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위대한 쇼맨>도 초반에는 언론의 관심을 모았지만, 같은 날 개봉했던 <신과 함께: 죄와 벌>(김용화, 2017)의 기운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요, 약 14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는데 그쳤습니다.

약 600만 명이 관람한 <레미제라블>(톰 후퍼, 2012)이나 약 36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라라랜드>(데미언 셔젤, 2016)에 비하면 화제성도 많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람객 만족도에 있어서는 두 작품만큼 높은 평점을 기록했으니 비운의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미지출처 : 네이버영화 ‘위대한 쇼맨’>

<위대한 쇼맨>은 쇼 비즈니스의 창시자인 ‘P.T. 바넘(Phineas Taylor Barnum)’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멋진 음악과 춤은 기본이고 한 남자의 성공과 실패를 통한 성장담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꿈과 도전, 성공과 실패 등 생각해 볼 거리도 많지만 영화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그가 시대의 편견을 깨고 처음 시도한 쇼의 내용입니다.

19세기 초에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넘’(휴 잭맨)은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는 한 소녀, ‘채리티’(미셸 윌리엄스)를 좋아합니다. 그 소녀에게 바넘은 자신이 꾸고 있는 멋진 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히죠. 어른이 되어 채리티와 가정을 꾸린 그는 곡절 끝에 박물관을 하나 인수합니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한 ‘바넘의 미국 호기심 박물관’이 인기가 없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바넘은 일명, ‘특이한 사람들’을 모집해 쇼를 만들기로 합니다. 키가 아주 작은 사람, 아주 큰 사람, 수염이 잔뜩 난 여성, 공중곡예사, 온 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 등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을 감춰왔던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냅니다. 한 편에서는 쇼 출연자들을 괴물이라 욕하고, 사기꾼들의 서커스라고 악평하기도 하지만 바넘의 이 특별한 쇼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영화 ‘위대한 쇼맨’>

바넘이 훌륭한 박애주의자여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었기에 독특한 사람들을 그저 상업적으로 이용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원들을 섭외할 때의 태도를 보면 당시의 대중들과 달리 그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넘은 관객들에게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꿈이 이루어지는 무대를 보여주고자 했고, 영화는 그것을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와 연결시킵니다.

바넘의 쇼에 대해 혹평을 했던 비평가까지도 나중에는

“피부색과 신분을 안 가리고 온갖 다양한 사람들을 동등하게
무대에 세우는 건 딴 비평가라면 ‘훌륭한 인간애’라고 했을 거다.”

라고 말하니까요.

이것이 바넘의 초심입니다.

이 초심이 그를 부자로 만들었고, 돌연변이라 무시당하던 이들을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크게 성공한 바넘은 귀족들을 공략하는 공연을 만들고자 합니다. 양복장이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가 그를 옭아매고 있었던 데다 영국 여왕의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제니 린드’(레베카 퍼거슨)라는 아름다운 여가수를 보고 그녀와 함께 일해 보고 싶었던 거죠.

그의 단원들과 서커스, 그리고 가족들을 뒷전으로 미뤄둔 채 바넘은 제니와 공연 투어를 떠납니다. 바넘은 그렇게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어릴 때부터 가졌던 꿈과는 다른 욕망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기획을 하는 것은 비즈니스맨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류 사회에서 인정받고픈 그의 욕구가 계급적 차별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아이러니 합니다.

제니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바넘은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파티장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눈부시도록 빛나는 제니를 보고 흔들리고 맙니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된 영화이니만큼 부적절한 대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넘의 모호한 태도가 제니에게 상처를 줬고, 그녀가 공연을 그만두는 바람에 바넘이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죠.

<위대한 쇼맨>에서 일과 사랑에 대한 바넘의 탈선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현실에서도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런 것처럼, 모든 사건 사고는 연결되어 있고, 방심하는 사이 동시에 터져 버리게 되죠. 바넘과 달리 곧은 심지를 갖고 있는 인물은 아내, 채리티입니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영화 ‘위대한 쇼맨’>

<위대한 쇼맨>은 신나는 쇼 장면이 일품이지만 상당히 로맨틱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꿈 많은 바넘을 좋아했던 채리티는 미련 없이 부모님댁을 나와 고생을 자초합니다. 온화한 성품의 그녀는 가난해도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행복을 찾고, 사교계의 곱지 않은 시선도 적당히 무시할 줄 알죠. 바넘과 제니의 스캔들에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바넘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구요. 단원들도 변함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극장이 불타고 바넘이 실의에 잠겼을 때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말하죠. 단원들은 여전히 바넘이 그들에게 만들어준 인생의 기회를 기억하고, 그들의 쇼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단원들 덕분에 바넘은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에필로그 전 마지막 신에서 힘찬 노래에 맞춰 다시 시작된 그들의 서커스는 가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넋이 나갈 만큼 환상적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의상은 매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바넘은 쇼를 할 때 번쩍이는 조끼를 입고 ‘사기꾼 왕자’라고 쓰인 모자를 쓴 채 관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제니와 무대에 설 때는 연미복을 입고 점잖은 체 하죠. 그러나 자유롭게 공연장을 뛰어다닐 때 바넘은 터질 듯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단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여왕을 알현할 때 입었던 멋진 드레스와 정장은 그들의 개성과 끼를 모두 가둬버립니다. 반대로 공연복 자체는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그것을 입고 뛰어다니는 단원들은 너무나 매력적이죠. 무엇보다 쇼는 더 화려해졌지만 그들이 초반부 공연 장면에서 입었던 의상(그와 같거나 아주 유사한)을 다시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디, 처음 맞이한 오늘이 설레기를

“전부를 잃었지만 얻은 게 더 많아 이제 나 돌아왔네. 그대들에게… 이제부터는 환호와 갈채에 눈멀지 않으리. 이제부터는. 내일로 미뤘던 걸 당장 시작하리. 오늘 밤부터. 집으로 돌아가리.“

바넘만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도, 신나는 일을 하는 것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옳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란 다 고달프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또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지언정 엉뚱한 짓은 하지 않으니 염려할 필요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어이없는 사건, 사고가 곧잘 터지곤 한다는 것을 많이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넘에게 찾아왔던 잘못된 욕망과 유혹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이, 직책, 소속과 관계없이 초심을 기억하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과 유사하지만, 조금은 덜 비장하면서 훨씬 더 가슴을 뛰게 하는 말 아닐까요.

부디, 평생 처음 맞이한 오늘을 처음 그 마음으로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윤성은 | 영화평론가

2010년 한양대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1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BS 시네마천국 MC를 비롯해 여러 라디오 및 TV 프로그램이나 지면을 통해 영화를 소개해 왔습니다. 현재 부산일보에 ‘윤성은의 스크린산책’을 연재하고 있으며, EBS 교육뉴스와 연합뉴스 TV에서 문화예술계 전반의 소식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각종 강의, 심사, 평론 활동을 근간으로 ‘윤성은의 스크린뮤직’ 팟캐스트 진행, 들꽃영화상 프로그램 디렉터, 문화예술월간지 ‘쿨투라’ 편집위원 등 외부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