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나라의 문화 또는 정신을 대표하는 말로 ‘선비’를 꼽습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영국의 신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말이지요. 선비는 학교의 윤리교과서나 교양서,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요? ‘꼿꼿함’, ‘강직’, ‘고결’, ‘청렴’, ‘정직’ 등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융통성 없는’, ‘답답한’, ‘꼰대’ 등등 부정적인 이미지도 없지 않습니다. 요컨대 선비는 의관을 정제하고 하루 종일 글만 읽으며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니 ‘선비’를 외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선비의 경지는 너무 고결하여 속인(俗人)으로서 범접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재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거두어 정돈하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어서 매일 ‘소학(小學)’의 내용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젊은이나 어른들이 글방에 모여 여럿이 제멋대로 자세를 흩트리고 있는 속에서도 반드시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았으며, 옷매무새를 반드시 단정히 하고 언행을 언제나 삼갔다. (‘퇴계선생언행록’ 권2)
현대인인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요? 아니,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선비도 밥은 먹는다
선비도 사람인 이상, 경제생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실력과 운이 겸비되어 나라의 녹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른다면 그나마 낫겠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고시와 마찬가지로 관료가 되는 길은 바늘구멍이었습니다.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관직을 거부한 선비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선비의 경제생활,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나눔’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위에 묘사된 선비상의 주인공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자호(自號)에 사용된 물러날 ‘퇴(退)’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퇴계는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선호했습니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이윽고 그 일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50세 이후에는 주어지는 관직을 거의 대부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거나 마지못해 나아간 경우에는 서둘러 사직을 하고 낙향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퇴계에게 국가의 녹봉은 거의 경제적 기반은 되지 않은 셈입니다.
최고경영자 퇴계
학자로서의 퇴계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이자, 농업 경영인으로서의 퇴계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직업 개념으로 따지만, 사실 퇴계는 관료나 선생님이었다기보다는 경영자에 가깝습니다. 관직은 자주 사직했고,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퇴계는 거기에서 어떠한 보수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제자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입장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소수서원)
퇴계의 주 수입원은 약 3000두락에 달하는 전답이었습니다.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60만평에 해당하는 면적입니다. 그것도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자경(自耕)을 했을 리는 없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 전답을 경작했을까요? 그것은 300여명에 달하는 노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미지출처 : 위키피디아 ‘도산서원’)
노비라고 하니, 독자 여러분 중에는 퇴계가 300여명의 몸종을 거느리고 호화생활을 한 것으로 오해해서 상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노비는 집안일을 담당하는 솔거노비가 아닌 외거노비, 즉 소작농을 가리킵니다. 각각 독립된 영역의 전답을 경작하고 해마다 소작료를 납부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즉, 퇴계는 300여명의 직원을 둔 농업회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궁핍한 삶
상당한 규모의 회사를 가진 최고경영자이니만큼, 이론적으로 퇴계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넉넉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퇴계는 항상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을 단칸방을 벗어나 본 적도 없고 고급스런 옷과 음식을 즐기지도 않았습니다.
선비니까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시의 문헌이 보여주는 퇴계의 생활상입니다.
영의정 심연원과 대제학 정사룡이 아뢰기를,
“이황은 재주와 행실을 함께 갖추어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황은 청빈으로 자신을 지키므로, 서울에 있을 적에도
본디 집에 부리는 하인이 없어서 땔나무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명종실록> 권24, 무오(1558년) 6월9일
“늦곡식이라도 심어서 싹이 나야 할 텐데 어쩌면 좋으냐?
식구는 많고 양식은 다 떨어져서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올해는 살아갈 길을 보통 때처럼 대처해서는 안 되고,
철저히 절약해서 어떻게든 연명해 가야할 것이다.”<아들 준에게 답하는 편지> (1553년)
문헌은 드러나는 퇴계는 검소나 청빈의 수준을 넘어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때로는 의식주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였지요. 이것은 무슨 일일까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순 없다.
당시 조선사회는 전반의 국가 경제가 침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중종부터 명종 대까지 조선은 연속된 흉년에 시달렸습니다. 퇴계가 대량의 농지를 가지고도 ‘연명’을 걱정해야 했다는 것은 이런 전반적인 국가 경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지주의 입장에서 재산을 축적해 풍요를 누릴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소작료를 높이면 간단하겠지요. 사실 그 많은 땅에서 조금씩만 소작료를 높여도 금세 눈덩이처럼 재산을 불릴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퇴계는 궁핍하게 살지언정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주의 형편이 그 정도라면, 소작농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려운 농민으로부터 소작료를 올려 받는다는 것은 선비로서 차마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퇴계는 없는 살림 속에서 하나라도 더 친지와 이웃에게 베풀며 살았습니다. 퇴계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들어오는 선물도 많았습니다. 선물이 들어올 때마다,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으면 안 될 것을 꼼꼼히 따져서, 많은 경우 거절하거나 돌려보내곤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아서,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대부분 친지나 이웃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재산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소유로만 삼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지요.
나눔의 실천
학자나 스승으로서의 선비 퇴계는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인으로서 퇴계는 누구나가 닮을 수 있는 선비의 모습입니다. 직업을 막론하고 우리는 누구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경제인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닿는 만큼 최대한 벌어서 나눌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나누는 것이 진정한 경제, 즉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길이 아닐까요?
이는 퇴계처럼 극도로 궁핍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퇴계가 궁핍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퇴계가 현대사회를 살아간다면, 그렇게 곤궁한 생활로 일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다 함께 잘 사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확실한 것은 빈부의 격차가 있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약자가 있는 한, 퇴계는 여전히 끊임없이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혼자만이 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