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에 발표된 『송뢰금(松籟琴)』이라는 한국 소설,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학창시절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들어본 기억이 나신다면 다행입니다. 끝까지 읽어보신 분이 있다면 그것 참, 놀랄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독자들이 쉽게 읽기는 참 어려운 소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11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읽어볼 만한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경제활동에 종사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사회의 출발 지점을 이 소설이 생생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회사에 다녀야 할까요?
왜 우리는 경제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존재의의를 획득하게 된 걸까요?
사실 이 물음은 <기업과 경제>가 <왕과 정치>에 육박하는 무게감을 지니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변화, 즉 ‘근대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화에서 파생된 물음입니다. 지금은 응당 그러려니 넘기는 물음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부분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직업 가지고 따박따박 월급 받으며 사는 ‘평범한 삶’을 꿈꿔 옵니다. 그러나 사실 이 ‘평범한 삶’의 모델은 100여 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가졌습니다. 1908년 『송뢰금』이 ‘노동자’와 ‘실업가’라는 ‘평범한 인간’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처음 등장시켰을 때, 독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죠. 새로운 인물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변화란 이런저런 변주(變奏)들과 같습니다. 아무리 달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제 선율은 같습니다. 2018년 한국에서의 삶이 1908년 『송뢰금』이 보여준 모델의 변주이듯 말입니다. 하지만 예컨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3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전환처럼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는 주제 선율 자체의 교체에 맞먹는 근본적 변화입니다.
그 말인즉슨 이제까지 있었던 변주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 주제 선율에 맞춘 새로운 변주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막대한 수고가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음’ 시대로의 전환을 정면에서 다룬 이 소설을 통해, 같은 종류의 전환을 앞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한번 살펴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결단
구를 전(轉)과 바꿀 환(換)을 써서 만드는 ‘전환’이라는 단어는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뀐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방향이나 상태가 달라지면 기존의 가치관과 생태계는 급속하게 해체됩니다. 그 시대에 박혀있는 사람들의 개별적 삶도 이 해체와 함께 극심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죠. 시대의 전환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담을 지웁니다.
고생하여 축적한 과거의 경험들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낡아진 체제를 버려야 한다면 그 속에 우리가 피땀 흘려 마련한 자리와 기득권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버리기로 했다고 뾰족한 수가 나지는 않습니다. 시대의 향방을 아무리 예측해본들, 실제로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는 우리의 예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대가 바뀐다고는 하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바뀌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나서 시대가 바뀐다면? 지금 내가 기를 쓰고 뛰어나가는 게 실제로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 아닐까요?
그러니 이 부담은 이중삼중으로 더해집니다. 첫 번째로 시대의 전환을 확신해야 하고, 두 번째로 그 전환이 열어줄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세 번째로 그 세계에 뛰어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줍니다. 결국 문제는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처하냐는 것입니다.
『송뢰금』의 주인공 ‘근암’과 ‘김 진사’는 실로 단호한 대처법을 내놓았습니다. 시대의 전환을 직시했다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양반 출신으로 과감하게 ‘실업가’와 ‘노동자’로 변신한 인물들입니다.
『송뢰금』의 배경이 된 1900년대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타파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신분질서에 기초한 중세적 사회 감각이 짙게 남은 시대입니다. 태생으로 귀천(貴賤)을 분간하는 신분제가 몇 백여 년 동안 사회적 삶을 결정해왔는데, 하루아침에 없앤다고 선언한들 그 감각이 일소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니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노동’과 ‘상업’에 뛰어든다는 결단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겠습니까?
이 용기를 뒷받침해준 것은 자신의 안목에 대한 믿음입니다. 시대의 전환은 박두해 있고, 바로 지금 따라 나서지 못하면 영원히 뒤처질 것이라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기에, 근암이나 김 진사는 양반으로서 예정되어 있던 길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단은 대체로 환영을 받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오백년을 벼슬독이 골수에 박여 실업이라면 천하기가 한이 없는 줄 알았으니 그렇지 아니하겠나.
『송뢰금』에서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근암과 김 진사는 굳이 ‘천하기가 한이 없는’ 일을 자처한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근암과 김 진사야말로 시대의 향방을 꿰뚫고 미래에 도전한 선구자, ‘첫 번째 펭귄(first penguin)’입니다.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응이란 결국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결단으로 압축됩니다.
‘나’를 ‘우리’로 확장해주는 가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 들어본 적 있으시지요?
이 말로 함축된 근대 사상을 자조론(自助論)이라 부릅니다. 1859년 영국에서 새뮤얼 스마일즈(Samuel Smiles)가 Self-Help라는 책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얻었는데, 자조론이란 이 책에 집약된 담론을 가리킵니다.
Self-Help는 출간되자마자 유럽과 동아시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당시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1900년대 한국에서는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국민 하나하나가 ‘자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도대체 ‘스스로(自) 돕는다(助)’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노력해야 한다’는 뜻과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조’는 그때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 근대에 필요한 ‘독립적 개인’의 창조를 겨냥한 담론입니다. 당시 ‘독립적 개인’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진 것이 ‘경제적 자립(自立)’입니다.
세금을 걷어 국고를 충당하는 근대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부(國富)란 곧 국민 한 명 한 명의 부(富)의 총합이기 때문에, 국민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당연히 국가도 부유해져서 군사력에 쏟을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자연스럽게 국가가 부강(富强)해진다’는 논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송뢰금』은 바로 이 ‘자조’라는 가치를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자조’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노동과 실업, 즉 ‘경제’의 가치가 상향조정될 수 있었고, ‘경제’의 가치가 상향조정되었기에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겼던 ‘노동’과 ‘실업’에 선뜻 뛰어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근대 세계에서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나’보다 큰 것―민족, 사회, 국가―에 연결됨으로써, 그 안에서 ‘나’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경제활동은 귀하지 않게 태어났기에 하라고 정해진 직분(職分)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송뢰금』은 경제활동을 국난(國難)을 극복하는 ‘무명의 영웅’들의 일이라고 재규정합니다. 그렇게 ‘노동자’와 ‘실업가’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처한 기업은 상황의 전환을 받아들이는 유연성, 위험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창의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월급, 보너스, 승진 같은 당근만으로는 구성원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당근의 한계는 명백합니다.
‘나의 이득’이 목표라면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근이 먹고 싶으면, 당연히 당근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실히 증명된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상수입니다.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서 새로운 일거리를 내놓고 틀을 만들어봤자 시행착오를 거듭하느라 나만 피곤하고, 우리 팀도 피곤할 것이 뻔한데 심지어 당근이 나올지 말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키는 일만 잘하는’ 인재로만 채워진 기업이 새로운 시대로 무사히 타고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문제입니다.
우리에겐 채찍이 필요합니다.
다만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우리를 축소시키는 채찍이 아니라, 당근 너머로 우리를 살짝 떠밀어 주는 채찍이 필요합니다. ‘나의 이득’ 너머를 생각하려면 반드시 ‘우리’라는 맥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송뢰금』이 보여주듯이 ‘우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가치입니다.
‘나’는 힘들어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수고와 위험을 감수하고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동기를 얻고, 주변 사람들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할 동기를 얻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지금의 노동에 사회적 의의를 부여해줄 수 있는 가치입니다.
‘성과 낼 방법 좀 생각해봐, 그거 못 하면 너 잘려’처럼 공포에 호소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올라설 수 없는 지점에 사람들을 밀어 올려주는 것이 가치의 힘입니다. 김 진사와 근암이 보여준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세상의 오해와 방해에 굴하지 않는 의지 같은 긍정적 에너지가 ‘자조’라는 가치에 의지하여 나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같은 첨단 정보기술이 기존 산업에 융합되어 기성 체제를 혁신하는 한편, 로봇공학, 생명공학, 나노기술과 같은 다른 첨단 기술과 결합하여 우리 삶의 근본 형태를 재결정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들어도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이 완수된 시대의 전모를 지금 정확히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TV가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영화가 사멸하리라고 예측했었습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예측이었지만, 실제로는 빗나갔죠.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의 입구에 겨우 다가섰을 뿐이고, 앞으로 무엇이 어떤 식으로 내 삶을 변화시킬지 그 순간이 오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무섭고도 기대되는 변화 한가운데 처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한 힌트는 『송뢰금』 같이 오래된 소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변화의 내용은 새로워도, 변화 그 자체는 새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뢰금』은 전환을 받아들이는 결단, 그리고 이 위험한 길을 함께 헤쳐가야 할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가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